지난해 세계보건기구(WHO)는 세계인의 건강을 위협하는 10가지를 꼽으며 그중 하나로 ‘백신 접종 거부 움직임(Vaccine hesitancy)’을 들었다. 홍역·볼거리·풍진(MMR)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사실과 다른’ 내용이 유럽과 미국 등을 중심으로 퍼지며 접종률이 떨어진 탓이다. 접종률이 낮아지자 홍역 환자는 세계적으로 30%가량 증가했다. 백신은 수많은 인류를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공보건의 승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런 백신에 대한 접종 거부를 WHO는 크게 우려한 것이다.
최근 국내에서 인플루엔자(독감) 백신과 관련해 유통 중 상온 노출, 침전물 발견 등 백신 신뢰도에 타격을 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독감 예방접종 후 사망했다는 신고가 잇따르면서 접종을 기피하는 사람들도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특정 백신에 대한 불안감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 다른 감염병 백신의 접종 기피로 이어지는 걸 우려하고 있다.
○ 높은 신뢰도, 하지만 추락은 한순간
한국은 백신 접종률이 높은 나라다. 그만큼 신뢰도도 높다는 얘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7년 국내 만 65세 이상 어르신 독감 백신 접종률은 82.7%로 OECD 회원국 중 제일 높았다. 두 번째로 높은 영국은 72.6%였고, 이웃 나라 일본은 50.0%였다. 독일은 한국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34.8%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만 3세 아동의 6종 백신(소아마비, 수두, 폐렴구균 등) 평균 접종률도 97.2%로 호주(94.6%), 영국(93.1%), 미국(86.9%)보다 높았다.
하지만 백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번져 불안감이 쌓이기 시작하면 신뢰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게 전문가의 지적이다. 김우주 고려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미국과 유럽 등에서 거부감이 컸던 마스크 착용이 우리나라에서는 잘 지켜지는 것처럼 우리 국민들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는 ‘얼리어답터’ 특성이 있다”며 “그동안에는 백신이 안전하고 효과적이라고 하니 잘 받아들였지만 부정적 인식이 퍼지면 순식간에 접종을 기피하게 되는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상온 노출 사고 등 올해 독감 백신의 안전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잇따르자 보건당국의 발표와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경우도 잦아졌다. 지난달 독감 접종 후 사망자가 발생하자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중국산 독감 백신을 맞고 사망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정부가 공급하는 무료 백신이 중국산이라는 얘기인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독감 접종을 받는 모습을 공개하자 ‘장관이 맞은 백신은 외국산이다’라는 근거 없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중국 관영언론 환추시보는 “한국 보건당국이 사망과 백신의 관련성을 부인했지만 아시아 이웃 나라들이 겁에 질렸다”며 “이로 인해 독감 접종을 희망하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며, 많은 나라에서 코로나19와의 싸움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했다.
○ 백신 불안이 감염병 재유행 불러올 수도
백신 접종 기피는 주로 접종에 따른 심각한 이상반응이 알려지거나, 불안감을 키우는 이야기가 퍼질 때다.
1970년대 말 일부 국가에서 백일해 백신이 뇌손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얘기가 돌았다. 백일해 백신이 개발되고 30년가량 지났을 무렵이다. 스웨덴에서는 백일해 백신을 접종한 아동 17만 명 중 1명꼴로 영구적인 뇌손상이 일어난다는 주장이 나왔다. 영국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제기됐다. 모두 사실과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하지만 백신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80∼90%대였던 스웨덴과 일본의 백일해 백신 접종률은 10%대로 떨어졌다.
1976년 미국에서는 과거 스페인독감 바이러스와 유사한 신종독감 바이러스가 발견됐다. 미국 정부는 감염병 유행을 막기 위해 국민 2억 명을 대상으로 한 접종 사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열흘 만에 펜실베이니아주에서 노인 3명이 접종 후 사망했다. 미국 정부는 같은 해 말 백신 접종 사업을 중단했다.
영국 런던의 소화기내과 전문의 앤드루 웨이크필드는 1998년 12명의 공저자와 함께 의학저널 ‘랜싯’에 논문 한 편을 실었다. MMR 백신이 아동에게 자폐증과 장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논문은 소수의 샘플만을 토대로 작성되는 등 연구 방법론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랜싯은 이 논문을 철회했다. 하지만 이 논문이 발표된 뒤 유럽과 미국 등에서는 MMR 백신 접종률이 크게 떨어졌다. 홍역 청정국으로 불리던 일부 국가에서 홍역이 다시 유행하기도 했다.
○ 코로나19 백신 개발, 속도전 양상 우려
올해 8월 11일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코로나19 백신(스푸트니크V)을 개발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임상 3상을 건너뛴 개발이어서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잇따랐다. 중국은 6월 자국 기업인 캔시노가 개발한 코로나19 백신 후보 물질을 임상 3상 이전에 승인하고 군인들에게 접종했다.
어느 나라, 어느 기업이든 내년 안에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성공하면 인류 역사상 가장 빨리 만들어낸 백신으로 기록된다. 지난해 12월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가 처음 보고되고 2년 이내에 백신이 탄생하는 것이다. 1989년 개발된 장티푸스 백신은 세상에 나오기까지 105년이 걸렸다. 1953년 처음 확인된 전염병 수두는 1995년에 백신이 나왔다. 개발에 40년 넘게 걸린 것이다. 1947년 처음 확인된 지카바이러스는 아직 백신이 개발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코로나19 백신은 개발을 두고 각국의 제약사가 속도전 양상을 보이고 있어 전문가들 사이에서 안전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경주마 달리기처럼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백신이 가장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짧은 개발 기간은 안전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김 교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백신 개발에 대개 10∼15년이 걸린다. 그런데 그 기간을 10분의 1로 줄여서 개발하려는 게 코로나19 백신”이라고 했다. 이런 탓에 내년에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돼도 바로 맞겠다는 사람이 많지 않을 수 있다.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팀과 경기도 공공보건의료지원단은 지난달 경기도 거주 성인 남녀 2548명을 대상으로 ‘코로나19 위험인식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2.2%는 코로나19 백신이 1년 안에 개발된다고 해도 ‘안전성이 입증될 때까지 접종을 미룰 것’이라고 답했다. ‘비용과 무관하게 개발되는 즉시 접종하겠다’고 한 응답자는 19.5%에 그쳤다.
이재갑 한림대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독감 백신처럼 20∼30년간 안전하다고 여긴 백신에 대한 신뢰도 이번처럼 한 번에 흔들릴 수 있는데 코로나19 백신은 임상적 증명도 많이 안 된 상태에서 출시될 예정”이라며 “국민들이 안전성에 의구심을 갖게 되면 상당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독감 백신에 대한 불안감부터 확실하게 잠재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 백신, 매년 200만∼300만 명 구해
인류의 건강과 질병 예방을 위해선 백신 접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백신 접종으로 감염병 환자와 사망자 수가 확연히 감소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1955년 소아마비 감염 환자 2만9000명, 사망자가 1000명에 달했던 미국은 1960년대 말 이후 소아마비 환자가 사라지다시피 했다. 소아마비 백신은 1955년 개발됐다. 네덜란드는 1974년부터 11세 소녀를 대상으로 풍진 백신을 접종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 매년 2000∼3000명에 이르던 환자 수가 예방접종 이후 700∼800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WHO는 백신 접종이 해마다 200만∼300만 명의 목숨을 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18년 국제 여론조사업체 ‘웰컴글로벌모니터’에 따르면 백신 안전성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아프리카, 남아시아 등의 지역에서는 의료진과 과학자에 대한 믿음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유럽이나 북아메리카 등에서는 신뢰도가 낮았다. 최원석 고려대안산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백신에 대한 종합적 지식이 아닌 파편화된 지식을 갖고 있다면 지식수준이 높은 국가에서 오히려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며 “과학이나 의학기술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면 음모론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 경향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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