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혁명’ 아랍의 봄 10년… 민주화 사라지고 권위주의 득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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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현장을 가다]
‘민주화 성지’ 타흐리르 광장 감시 삼엄
아랍권 전역이 독재와 내전 등 몸살… ‘권위주의가 차라리 낫다’ 목소리도
경제난 해결 없인 민주주의 정착 요원

22일 오후 이집트 수도 카이로 한복판에 있는 ‘민주화 성지’ 타흐리르 광장에 인파없이 차량만 오가고 있다. 당국은 곳곳에 경찰과 군민을 배치해 오가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광장 사진을 찍지 못하게 했다. 이로 인해 이 사진은 인근 고츨 건물의 높은 곳에 올라가 찍었다. 카이로=임현석 특파원 lhs@donga.com
22일 오후 이집트 수도 카이로 한복판에 있는 ‘민주화 성지’ 타흐리르 광장에 인파없이 차량만 오가고 있다. 당국은 곳곳에 경찰과 군민을 배치해 오가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광장 사진을 찍지 못하게 했다. 이로 인해 이 사진은 인근 고츨 건물의 높은 곳에 올라가 찍었다. 카이로=임현석 특파원 lhs@donga.com
임현석 카이로 특파원
임현석 카이로 특파원
22일 오후 3시(현지 시간) 이집트 카이로 도심에 위치한 타흐리르 광장을 찾았다. 사진을 찍으려고 스마트폰을 위로 치켜들자마자 사복 경찰 3명이 다가와 기자를 에워쌌다. 위협적인 태도로 “어디서 왔느냐. 왜 사진을 찍느냐”며 윽박질렀다. 신분을 밝히고 광장 사진을 찍으려 한다고 설명했지만 “촬영하지 말라. 지금까지 찍은 사진도 모두 지우라”며 불허했다. 할 수 없이 인근 건물의 높은 층으로 올라가서 겨우 광장 모습을 찍었다.

약 150년 역사의 타흐리르 광장은 아랍어로 ‘해방’이란 뜻을 지닌 곳답게 원래 이집트를 넘어 아랍권의 대표적 민주화 성지로 꼽혔다. 특히 2011년 초 호스니 무바라크 당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국민 수만 명이 이곳에 모여 정권 타도를 외쳤고 전 세계가 이를 주시했다. 결국 30년간 집권했던 무바라크 대통령은 같은 해 2월 물러났고 두 달 후 부패, 권력 남용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서구 선진국에 비해 민주주의 전통이 짧다고 평가받는 아랍권에서도 시민 봉기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제 광장에서는 이런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길목마다 3, 4m 간격으로 경찰이 촘촘히 배치됐고 방탄조끼를 입은 군인 역시 2∼5명씩 조를 이뤄 옮겨 다니며 오가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도로에는 대형 호송차까지 등장해 위압감을 더했다. 민주화 성지가 아니라 계엄 통치의 현장이라고 해야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 시민혁명 성공했지만 권위주의 회귀
2010년 12월 17일 당시 26세였던 튀니지 노점상 무함마드 부아지지가 당국 허가 없이 장사를 했다는 이유로 과일, 채소, 저울 등을 압수당했다. 압수품을 찾으려면 돈을 내야 했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노점상에게 그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부아지지는 생계의 어려움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단속원들은 그를 거칠게 구타했다.

격분한 그는 몸에 휘발유를 들이붓고 불을 붙였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다음 해 1월 4일 화상 후유증으로 숨졌다. 즉각 튀니지 전역에서 거센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며칠 후 23년간 집권했던 진 엘아비딘 벤 알리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 이후 리비아 모로코 알제리 이집트 시리아 예멘 등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반정부 시위가 번졌고 각국의 권위주의 정권이 속속 몰락했다. 바로 ‘아랍의 봄’이다.

이 여파로 국제사회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과시했던 리비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등이 실각하면서 21세기에 걸맞지 않은 전제 왕정과 독재 정권이 많았던 아랍권 전체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것이란 기대가 커졌다. 하지만 꼭 10년이 지난 지금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시민혁명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경제난, 빈부 격차 등이 계속되자 각국에서 권위주의 정권이 재집권했다. 중앙정부 기능이 약해진 시리아와 이라크에서는 한때 이슬람국가(IS) 같은 극단주의 무장단체가 창궐해 전 세계를 테러 공포에 몰아넣었다. 리비아, 예멘 등은 아직까지 내전 상태인 데다 주요 강대국이 이곳에서 사실상 대리전까지 벌이고 있어 사태 해결이 더 어려운 상황이다.

○ 경제난에 무력감과 냉소 확대
전문가들은 이런 사태를 야기한 이유로 경제난을 꼽는다. 중앙정부 기능이 붕괴되면서 가뜩이나 취약한 산업 기반과 경제 구조가 더 허약해졌고 일부 산유국은 저유가 직격탄을 맞았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집계한 중동과 북아프리카 각국의 국내총생산(GDP) 수치만 비교해도 잘 알 수 있다. 2010년 당시 1만1417달러로 어지간한 중진국 수준이었던 리비아의 1인당 GDP는 현재 3282달러로 3분의 1 이하로 급감했다. 같은 기간 예멘 역시 절반 수준인 925달러로 하락했다. 국민을 착취하는 독재자만 물러나면 잘 먹고 잘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물거품이 된 것이다.

‘아랍의 봄’을 가능케 한 튀니지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현재 공식 실업률은 15%대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 등으로 서민들이 체감하는 실업률은 20∼30% 수준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시민단체 관계자 리아드 아비드 씨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경제난 탓에 가스 생산이 중단돼 불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도로 관리도 엉망인 상황에 시민들의 좌절감이 커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치적 민주화는 이뤄냈을지 몰라도 현재 시민들의 분노와 실망이 ‘아랍의 봄’ 당시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전했다.

이집트 상황 역시 비슷하다. 올해 2분기(4∼6월) 공식 실업률은 9.6%지만 많은 경제 전문가들은 19∼29세 청년층 실업률이 최소 30%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년, 하층민 등의 불만이 적지 않은 가운데 “누가 집권해도 똑같다”는 싸늘한 냉소와 무력감이 팽배하다.

군인 출신인 압둘팟타흐 시시 현 대통령은 2014년 집권했다. 4년 후 재선에 성공했고 지난해에는 임기를 6년으로 늘리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가 2024년 대선에서 또 이긴 후 사실상의 종신 집권을 시도할 것이란 관측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무바라크의 독재가 싫어 그를 몰아냈지만 불과 10년 만에 장기 집권 기반을 다진 대통령이 또 출현한 셈이다.

○ IS·난민 등으로 국제사회에도 나비효과
‘아랍의 봄’이 국제사회와 세계정세에 미친 영향도 상당하다. 내전과 경제난에 따른 중앙정부 기능 약화로 인해 IS로 대표되는 극단주의가 빠르게 확산됐다. 특히 시리아 등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수백만 명의 난민들로 인해 유럽 각국 또한 상당한 진통을 겪고 있다. 아랍권 각국의 내전 상황이 난민들을 대거 발생시켜 유럽에서 국수주의 및 극우주의가 준동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이로 인해 헝가리, 폴란드 등에서는 노골적인 반난민 정책과 국수주의 등을 내세운 정치인이 집권했다. 프랑스, 독일 등에서도 극우정당의 세력 확대가 심상치 않다. 난민과 반난민, 이슬람과 반이슬람 등의 대립에 따른 유럽 각국의 혼란, IS 잔당과 추종자들이 간헐적으로 벌이는 테러 등은 난민에 적대적이지 않았던 일반 유럽 시민들 사이에서조차 반난민, 반이슬람 정서가 퍼지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올해 10월과 11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등에서 이슬람 난민 출신이 평범한 시민들을 잇달아 잔혹하게 살해하자 각국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에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대표적이다.

○ “실패” vs “민주화 여정 속 불가피한 진통”
‘아랍의 봄’ 10년을 바라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우선 지난 10년의 상황이 보여주듯 사람들이 불안한 민주주의보다 안정된 권위주의를 원하게 됐다는 측면에서 실패로 보는 시각이 있다. 적어도 아랍권에서는 아직 민주주의 체제보다 차라리 독재자가 낫다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으며 이런 비관주의와 염세주의의 득세야말로 아랍의 봄이 남긴 가장 깊은 상흔일지 모른다는 지적이다.

또한 ‘아랍의 봄’이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터키 등 이 지역 맹주를 자처하는 이슬람권의 지역 강대국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 한계를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세 나라의 집권 세력 모두 지난 10년간 세습 왕정 및 장기 집권 토대를 닦는 데 여념이 없었고 국내 반대파를 철저히 탄압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아랍의 봄’은 기대와 달리 이슬람권의 권위주의를 무너뜨리기는커녕 오히려 강화시킨 ‘미완의 혁명’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반면 지나친 폄훼는 곤란하며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시민의식을 점화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작지 않다는 반론 또한 제기된다. 한 이집트 기자는 “최근 아랍권에서도 트위터 등을 통해 여성 운동가들의 페미니즘 운동이 광범위한 공감대를 얻고 있고, 많은 여성들이 남성 성범죄 사례를 공유하며 분노를 표출하자 경찰과 국회가 조사를 하기 위해 움직이는 등 차츰 사회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아랍의 봄’ 이후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사회 운동가들과 사회적 토론이 늘어났고, 이는 지난하지만 결국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지역센터장은 “보수적인 사우디 등 중동 수니파 군주국들도 여성 권리 제한을 철폐하는 등 국민 비판과 불만 여론에 반응하게 됐다는 점에서 아랍의 봄이 아랍권에서 변화의 불씨를 던진 것만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임현석 카이로 특파원 lhs@donga.com


#타흐리르 광장#권위주의#시민혁명#아랍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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