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 더 높은 곳으로, 멋진 사람들과 어울리는 쪽으로 가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 애쓰고, 사교 활동에 열을 올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년간 그런 노력을 하면서 느낀 건, 결국 사람들 마음의 종착역은 ‘내가 솔직해질 수 있는 곳’으로 향한다는 거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받아들여지는 환대의 공간과,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누구일까? 따뜻한 마음씨를 지녔거나, 나에게 애정이 있거나,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전 세계 사람을 모아 놓고 눈 감고 아무나 골랐는데 그런 사람을 발견했다면, 그건 아마 나와 같은 처지인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까, 같은 아픔을 느껴본 적 있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우리 부모님 이혼했는데, 너희 부모님도 이혼했구나.’ ‘고졸 출신이라 서러웠는데 너도 그랬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큰 병에 걸린다면, 그가 아무리 나를 의지한다 해도, 그 병에 걸려 본 사람만큼 그의 아픔을 헤아릴 순 없을 것이다. 나에겐 가까운 성소수자 친구가 많지만, 정작 그들이 사회에서 차별당할 땐 나보다 다른 퀴어 친구들에게 제일 먼저 고민을 털어놓고 싶을 것이다. 나 역시 내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옮겨 다녔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생각하는 것만으로 두렵지만, 세상의 모든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면 그 어떤 사람에게도 곁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사람 앞에선 이런 말 하면 안 돼, 어차피 이해받지 못할 거야’라며 입을 닫게 하는 상황을 안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소외받는다는, 차별받는다는 느낌을 안 주지 않을까.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아마 많은 일들이 겹쳐서 그랬던 것 같다. 황인찬 시인의 ‘사랑을 위한 되풀이’라는 시집에서 “이 모든 일을 언젠가는 다 적어야겠다고, 그러나 사실로는 적지 않아야겠다고”라는 문장을 보았다. 무엇보다 동생의 일이 컸다.
최근 동생이 수능을 봤다. 그리 좋은 성적은 아니라 전국에 있는 대학을 알아보는 중이다. ‘서울대 연고대 서성한 중경외시’로 학교를 따졌던 우리 가족의 뇌는 지각변동 중이다. 지금까지 그 서열에서 때론 혜택 받고, 때론 열등감을 느끼며 평생 살다가, 이제 막 청춘을 시작하려는 내 동생이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라는 질문에 주눅들 것을 생각하니 ‘그냥 다 망해 버렸으면’ 싶다. 하지만 그런 차별적인 문화가 지속되게 내버려 둔 게 누구였더라. 상대를 출신 학교로 짐작했던 적이 나에겐 없었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올해를 정리하는 100가지 질문 중 하나에 이런 게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 )해진다.’ 친구는 ‘시간이 갈수록 못나진다’라고 했다. 엄살이겠지만 딱히 부정하지 않는다. 농담이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훌륭해진다. 시간이 갈수록 나이가 들고, 나이가 들수록 인생에 슬픈 일이 발생할 확률이 크다. 그래서 비로소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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