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덕도에서 만난 제주해녀[김창일의 갯마을 탐구]〈55〉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15일 03시 00분


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가덕도 해양문화를 조사하던 필자는 지역 해녀가 아님에도 바다로 뛰어드는 해녀들을 먼발치에서 봤다. 어디서 왔는지 알기 위해 뭍으로 나올 때까지 몇 시간을 기다렸다. 4명의 해녀가 물질을 마치고 해안가로 나와서 쉴 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부산 영도에 거주하는 제주 출신 해녀로 젊은 시절 영도까지 바깥물질을 다니다가 정착했다고 한다. 남항대교를 건설하면서 해안이 매립돼 물질할 곳이 마땅찮아 가덕도까지 원정을 왔단다. 매년 11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 해산물을 채취한 뒤 영도로 돌아간다. 제주도에서 영도로 이제는 가덕도까지, 섬에서 섬으로 물질할 바다를 찾아다닌 삶의 여정이었다. 해녀들이 공동으로 머무는 집에 초대받아서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이야기하는 내내 그녀들은 해맑게 웃었지만 살아온 가시밭길은 육지에 정착한 해녀의 전형적인 생애사였다. 출향(出鄕) 해녀의 역사는 100여 년 전으로 올라간다.

제주해녀의 바깥물질은 일제강점기 때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세기 후반부터 간헐적으로 육지로 나가서 물질하는 해녀가 있었고, 1910년 이후 활발해졌다. 1890년대부터 일본 잠수기 어선 수백 척의 남획으로 제주어장에는 채취할 해산물이 부족했다. 당시 육지 사람들은 미역 이외의 해조류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제주해녀는 해산물이 풍부한 내륙으로 눈을 돌렸다. 초창기에는 경상, 전남 해안 위주로 물질을 했으나 점차 강원도, 함경도, 황해도는 물론이고 일본, 중국, 러시아까지 원정물질을 다녔다. 바깥물질하는 해녀가 늘어나면서 현지 주민들과 분쟁이 발생했다. 그 이면에는 상권 확보를 위한 해조상인 간 갈등이 있었다. 결국 비용을 지불하고 해산물을 채취했지만 입어료가 점차 인상돼 어려움을 겪는 해녀가 늘어났다. 이에 제주 유지들은 해녀조합을 조직해 한동안 해녀 권익보호를 위해 활동했다. 그러나 일본인 도지사가 조합장을 겸하던 해녀조합은 1920년대 후반부터 오히려 해녀를 수탈하는 조직이 됐다.

부산 영도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해조류 상인들은 해초의 수급 안정이 필요했다. 제주해녀를 모집해 영도에 집결시켰다가 기장, 울산, 경주, 포항 등 해산물이 풍부한 어촌으로 보냈다. 이런 전통이 이어져 광복 후에도 제주도민이 영도로 대거 이주했다. 동아일보(1970년 7월 25일자)에서 “물질 원정 왔다가 정착, 영도는 주민의 8할이 제주계(濟州系)”라고 했다. 필자가 가덕도에서 만난 해녀 4명도 이 시기에 영도로 이주했다. “가덕도 끝을 넘어가면 등바당을 넘어간다. 다대 끝을 넘어가면 부산 영도이로구나.” 해녀노래의 마지막 구절이다. 여기서도 최종 목적지는 영도다. 제주도민회관, 제주은행, 해녀문화전시관이 영도에 있는 것만 봐도 제주도민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영도는 작은 제주도라 할 만하다.

1970년대 중반까지 제주해녀의 바깥물질 행렬은 이어졌고, 현지 주민들과 크고 작은 갈등도 지속됐다. 한적한 어촌에 매년 수십 명, 많게는 100명 이상 모여들었다. 청춘남녀가 있는 곳에 사랑이 싹트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육지에 정착하는 해녀가 늘어났다. 도전과 적응의 세월을 보낸 출향 해녀의 위상은 높아졌고, 어촌계 결정권을 해녀들이 가진 마을이 곳곳에 생겼다. 지금도 출향 해녀의 힘찬 숨비소리는 겨울 바다와 맞서고 있다.

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가덕도#해양문화#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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