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에 눈길을 끄는 일화가 있다. 1987년 헌법 개정을 할 때 일인데, 당시 김종인은 국회 개헌특위 경제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그가 개정 헌법의 경제 분야를 맡게 되자 재계는 크게 긴장했다. 독일의 의사공동결정권 같은 제도를 우리 헌법에 넣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독일은 상시 직원 2000명 이상 기업의 감사위원회 구성 절반을 근로자 측에서 추천한 인사들로 채우도록 돼 있다.
그때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개정 헌법 초안을 놓고 토론회를 열었는데, 발제를 맡은 교수가 ‘경제민주화’ 조항은 사회주의 조항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고 한다. 당시 김종인은 토론자로 초청받았다. 발언 차례가 돌아오자 김종인의 대응이 흥미롭다. 발제에 대해 직접 반론하지 않고 ‘자본주의 역사’에 대해 일장 강연(?)을 했다. “자본주의에도 성공한 자본주의가 있고 실패한 자본주의가 있는데, 어떤 자본주의는 성공했고 어떤 자본주의는 실패했는지, 그리고 영미식 자본주의와 스칸디나비아식 자본주의, 유럽의 대륙 자본주의가 어떻게 다른지 하나씩 비교해가며 설명했다”고 김종인은 회고록에 적고 있다. 이 증언은 과거 여러 인터뷰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그는 왜 자본주의 역사를 그토록 강조했을까.
보수가 나아갈 길은 ‘미래 선점’
2021년 정초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국민의힘 소속 의원 전원과 주요 당직자들에게 ‘마코 루비오의 공공선(公共善) 자본주의와 좋은 일자리’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전달하며 꼭 읽어보라고 지시했다. 10쪽밖에 안 되는 보고서다. 마코 루비오가 2019년 11월 ‘퍼블릭 디스코스’지에 기고한 에세이를 그대로 번역하고 그것을 2쪽으로 요약해 덧댄 것이 전부다. 많고 많은 보고서 가운데 왜 굳이 그것을 골랐고, 왜 하필 마코 루비오인지, 여기서 김종인의 뜻을 슬며시 읽을 수 있다.
일단 마코 루비오가 누구인지 살펴보자. 루비오는 미국 플로리다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1971년생이다. 쿠바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김종인이 차세대 지도자감으로 어떤 조건의 인물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루비오는 미국 공화당 내에서도 이른바 ‘신보수주의자’로 꼽히며, 포괄적 이민정책을 주장하는 개혁파에 속한다. 김종인이 이번에 회람을 권한 보고서에도 드러나듯, 경제정책에서도 기존 공화당 주류와는 다소 다른 색채를 보인다. 그러니까 루비오는 태생과 경력, 철학과 정책 등을 블라인드 처리하고 “어느 당 출신일 것 같으냐” 물어보면 “민주당 아니냐”고 답할 사람이 많을 듯하지만 사실은 공화당인 그런 사람이다. ‘김종인의 조건’이다.
김종인이 루비오 보고서를 권하자 국민의힘 일부 의원은 “당을 좌(左)클릭하려고 그런 것을 돌렸냐” 비판했고, 김종인은 이에 대해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렇게 한심한 사람들하고 뭘 하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자조 섞인 어조로 응수했다. ‘공공선 자본주의’라는 생경한 용어 때문에 국내에는 뭔가 파격적인 내용이 담겼으리라 예상하는 사람이 많지만, 루비오의 퍼블릭 디스코스지 기고문은 사실 그리 특별한 내용은 없다. 다만 ‘자본주의’를 대하는 그의 열려 있는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역시 ‘김종인의 조건’이다.
루비오의 기고문에서 주목할 대목이 세 군데 있다. 첫째 ‘사회주의에 대한 경제적 대응의 차원에서’ 개혁해야 한다는 표현. 그러니까 ‘좌클릭’이 문제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나라가 완전히 ‘좌회전’ 당하기 전 보수가 먼저 선제 대응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루비오는 기존 경제정책에서 좌파와 우파의 문제점을 공히 지적한다. 좌파는 노동자 이익에만 집중하다 기업 이윤에 소홀했으며, 우파는 기업과 주주, 금융자본 이익에 집중하다 노동자 권익을 지키고 재분배를 실현하는 일에 소홀했다는, 거의 ‘상식’에 가까운 분석을 하고 있다. 그래서 경제가 불균형하게 성장하고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했으며, 이것이 계층과 지역, 인종의 분노를 불러왔고, 보수정당이 이런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좌파에게 주도권을 영영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와 걱정을 담고 있다. 여기서 루비오가 제안하는 ‘공공선 자본주의’는 김종인이 그동안 이야기한 ‘경제민주화’나 ‘포용적 성장’의 미국 버전 정도로 들린다. 김종인의 시각과 거의 일치한다.
둘째, 기고문에 나온 ‘존엄한 일자리’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를 ‘좋은 일자리’라고 풀이한 국내 언론이 있는데 단순히 ‘good job’이 아니라 영문으로 ‘dignified work’라고 표현했다. 품위 있는 노동, 혹은 양질의 일자리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우리 정부처럼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사실은 ‘통계 마사지’를 해보겠다고) 국가 재정을 쏟아부어 시간제 일자리만 왕창 만들어내는 그런 정책이 아니라, ‘인간다운 일자리’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우리가 지금부터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루비오는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기고문 제목 자체도 ‘공공선 자본주의와 좋은 일자리’다. 4차 산업혁명이 고도화하고 인공지능(AI)과 로봇이 보편화하면서 앞으로 사회정치적으로 어떤 문제가 첨예하게 이슈화될 것인지 한발 앞서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보수가 나아갈 길은 ‘미래 선점’에 있다. 존엄과 품위라는 보수주의 용어를 끌어와 노동과 일자리 문제를 보수 어젠다로 바꿔놓겠다는 탁견이 돋보인다.
셋째, 기고문 후반에 루비오가 “통치할 나라가 없는 상황에서 경쟁자에 대한 승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일갈하는 대목은 독자를 전율케 한다. 나라가 극단적으로 둘로 찢긴 상태에서 설령 어느 한쪽이 집권한다 한들 그것은 본질상 ‘나라가 없는 상태’이며, 그런 승리가 대체 무슨 의미를 갖느냐는 공화주의자다운 지적이다. 루비오는 ‘공동체의 회복’, 그리고 통합을 이야기한다. 미국과 우리나라를 비롯해 극단주의 정치세력이 판치는 세계 여러 나라 상황에서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던질 수 있는 가장 시의적절한 메시지다. 김종인이 국민의힘 내부의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도 이것이 아닐까 싶다.
보수진영 고질병이 다시 도지는 중
우리가 자본주의에 대해 갖는 가장 큰 오해는 그것을 ‘이념’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그래서 영원불멸한 어떤 것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신념 체계가 아니라 시스템에 가깝다. 그것이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와 다른 점이고, 그래서 현실 사회주의와 대결에서 자본주의는 승리할 수 있었다. 절대 이념이 아니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결합해 훨씬 유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종인이 1987년 전경련 토론회에서 ‘자본주의 역사’를 강연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나라마다 역사와 토양, 조건에 맞는 자본주의를 가꿔왔고, 그럼으로써 자본주의는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설명하려던 것이다.
한국에는 ‘자본주의 탈레반’이 존재한다. 자본주의를 원리주의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이다. 이른바 보수진영에 그런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자본주의=시장경제’라고 도식적으로 이해하고, 기업을 지키는 것이 자본주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신념처럼 말한다.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부터 틀렸고(시장 주체가 어디 기업뿐인가!), 그러니 자본주의에 대한 관점 역시 왜곡돼 있다. 자본주의에 여러 모델이 존재한다는 역사적 이해 또한 결여돼 있다. 김종인이 국민의힘에서 이루려는 개혁 작업은 정치적으로는 극단주의자, 경제적으로는 이런 원리주의자를 제어하고 변화시키려는 방향 아닐까. ‘루비오 보고서’가 유력한 증거다.
김종인은 의외로 쉽게 이해되는 인물이다. 변화구를 던지지 않고 자기 스타일의 직구를 계속 던져왔기 때문에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움직일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얕은 정치적 술수를 쓰지 않는다. 그것이 정당과 정파를 가리지 않고 위기 때마다 그에게 손을 내미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국민의힘에서 김종인이 이루려는 목표는 투명하게 내다보인다. 1월 11일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 김종인은 “정치는 건전한 합리적 중도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딱 그것이 그가 가려는 길이다.
2017년 대선까지 김종인은 이른바 ‘제3지대론’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국민을 정확히 반반으로 양분하고 있는 기존 양당체제 안에서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소 규모의 제3 정당이 존재해야 건전한 정치 발전이 가능하다는 지론이다. 김종인의 이런 구상은 지난해 21대 총선을 통해 극적 전환이 이뤄진 듯하다. “양당 정치의 한쪽 기둥이 완전히 무너질 위기를 보이자” 국민의힘에 합류하게 됐다고 김종인은 말한다(지난해 7월 14일 관훈클럽 토론회).
김종인의 최후통첩
무너진 한쪽 기둥을 일으켜 세우는 일, 그것이 지금의 자기 역할이라고 김종인은 생각하는 것 같다. 다가오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김종인이 이른바 ‘자강론’을 고집하는 것도 정치는 기본적으로 정당이 하는 일로 정당정치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겠다는 그의 의지와 통한다. 그런 김종인이 존재하는 한 ‘당을 뛰어넘는’ 후보 단일화 논의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김종인이 최근 한 라디오와 인터뷰한 대로 “이렇게 한심한 사람들하고 뭘 하겠나” 하면서 자리에서 물러나 판을 뒤흔들게 된다면 보수진영이 그나마 갖고 있던 마지막 희망의 실오라기마저 완전히 사라져버릴 수 있기 때문에 누구든 섣불리 김종인에게 반기를 들기 어려운 형편이다. 민주당 20년 집권의 서막이 제대로 열릴 것이니!
루비오 보고서는 김종인이 건넨 일종의 경고장이다. 루비오 보고서는 사실 각론에서 김종인의 기존 생각과 다른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개혁 의지와 방향성에서는 “이런 식으로 변화를 추구할 용의가 있으면 도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중대 결단을 할 수밖에 없다”는, 김종인이 국민의힘 내부에 던지는 일종의 최후통첩으로 읽을 수도 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판세가 야당에 유리하게 나오자 보수진영의 고질병이 다시 도지는 중이다. 김종인을 흔들어보겠다는 시도 또한 여기저기서 엿보인다. 정치9단은 이번 파도를 넘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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