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의 거짓말 논란을 놓고 정치권에서 깜짝 놀라는 사람이 많다. 김 대법원장이 “사표를 수리하면 (국회에서) 탄핵 얘기를 못 하잖아. 정치적 상황도 살펴야 한다”라고 말한 내용 자체가 노회한 정치인의 어법과 꼭 닮았기 때문이다.
특히 후배 판사의 사표를 반려해 결과적으로 더불어민주당이 헌정 사상 첫 판사 탄핵소추안을 의결하도록 기반을 마련해준 것에선 정치권에서 횡행하는 ‘이면계약’의 그림자도 엿보인다. 그렇다면 정치권은 김 대법원장의 이런 모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까? 2017년 김 대법원장의 국회 인사청문회를 복기해 보면, 김명수 파문의 예고편이 줄줄이 담겨 있다.
2017년 9월 국회 인사청문회 쟁점은 그해 3월 열렸던 법원장회의에서 김명수 당시 춘천지법원장의 행동이었다. 이 회의는 당시 이탄희 판사가 제기한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수습하기 위해 열렸다. 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은 김 대법원장을 ‘반(反)양승태’ 여론을 이끈 주역으로 지목하며 “회의에서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을 범죄자 다루듯 몰아붙였고 그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냐” “진상조사위원장에서 배제해야 할 인물을 꼽지 않았느냐”는 등의 질문을 쏟아냈지만 김 대법원장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일관했다.
반면 여당 의원이 이탄희 판사 얘기를 꺼내자 김 대법원장은 태도가 달라졌다. “‘이 판사는 능력도 출중한데 몇 마디 오해로 쉽게 사표를 던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문제 제기를 했느냐”고 묻자 “다른 법원장들도 동의했다”고 화답하며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야당 의원들은 “여당엔 ‘잘 기억난다’고 하고 야당엔 ‘어렴풋하다’고 하는 건 당당하지 못하다”고 질타했다. 인사청문회에서 ‘이탄희’라는 이름은 무려 11번이나 나올 정도로 청문회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이 판사가 21대 총선 때 민주당 의원이 돼 임성근 부장판사의 탄핵 의결을 주도한 것은 우연일까?
거짓말이 드러나자 “기억이 희미해졌다”고 둘러댄 김 대법원장의 모습은 2017년 청문회의 데자뷔를 보는 듯하다. 거짓말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당시 인사청문회를 통해 김 대법원장은 공명정대한 대법원장의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니라 특정 사건의 한쪽 당사자처럼 비쳤다. 김 대법원장에 대한 판단 근거는 그때 다 나왔던 셈이다.
하지만 당시 야당은 국회 임명동의안 부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2017년은 여당인 민주당 의석이 120석에 불과한 여소야대 국회로 야당은 얼마든지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캐스팅보트를 쥔 국민의당은 안철수 대표와 호남계의 충돌 끝에 자유투표라는 정치적 선택을 했고,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도 다른 야당 설득에 건성이었다. 전방위로 국민의당 의원들을 설득했던 건 오히려 민주당이었다.
야당은 지금 와서 “김명수 탄핵”을 외치고 있지만, 기회가 왔을 때 실력을 발휘해 오늘의 김명수 파문을 막는 게 국민을 위한 일이었다. ‘김명수 본색’을 4년 만에야 본 국민은 당시 무능 야당을 기억하고 있고, 지금도 지켜보고 있다. ‘제2의 김명수 청문회’는 앞으로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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