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25일 ‘사실 적시 명예훼손’을 처벌하도록 한 형법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것은 디지털 시대의 명예훼손 양상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헌재는 “최근 정보통신망을 통해 명예훼손 표현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데 피해자로서는 게시물 삭제 등을 유도하기 위해 명예훼손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유남석, 이석태, 김기영, 문형배 등 4명의 재판관은 “거짓 명예보다는 진실한 사실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며 일부 위헌 의견을 냈다.
○ ‘합헌’ 5인 “사적 제재 수단 악용 우려”
헌재의 이번 헌법소원심판은 2017년 이모 씨가 수의사의 진료 행위로 인해 반려견이 실명할 뻔했으나 처벌 우려 때문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피해 사실을 알리지 못하게 되자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청구한 것에 따른 것이다.
최근 ‘미투(#MeToo)’ 운동과 소비자 고발 등 사례가 늘고 있는 가운데 헌재는 사실을 적시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민형사상 절차를 거치지 않은 일방적인 주장은 “사적 제재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재판관 5명의 합헌 의견에서 “개인의 명예는 일단 훼손되면 완전한 회복이 어렵고,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피해자가 자살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례도 있다”며 “사실 적시로 명예를 훼손하는 표현을 규제해 인격권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포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특히 최근 인터넷과 SNS 등을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명예훼손 표현이 빠르게 전파될 수 있다는 점도 합헌 논리로 제시됐다. 헌재는 “정보통신망에서 정보가 빠르고 광범위하게 재생산되기 때문에 피해자가 반박하거나 일일이 삭제를 요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비범죄화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만들어졌다고도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헌재는 또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실을 알렸다면 처벌되지 않는다는 제한 규정이 있고 법원 및 헌재에서 ‘공공의 이익’을 폭넓게 해석하고 있다”며 “‘사실 적시 명예훼손’을 처벌하더라도 표현의 자유가 크게 위축되지 않는다”고 했다.
헌재는 현행 법 제도에서 명예훼손 피해를 막기 위한 실효성 있는 방안은 사실상 형사처벌뿐이라고 봤다. 영국과 미국은 명예훼손죄를 없애고 당사자끼리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사실관계를 다투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헌재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도입된 이들 국가와 우리의 사정은 다르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에선 피해자가 오랜 기간 비용을 들여 소송을 벌인 뒤 상대방에게 적은 액수의 벌금을 물릴 수밖에 없어 사실상 피해 회복과 명예훼손 방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일부 위헌’ 4인 “권력 감시와 비판 위축 우려”
하지만 유남석 헌재 소장을 비롯한 4명의 재판관은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가 헌법으로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들 재판관은 반대의견을 통해 “합리적 인간이라면 수사와 재판에 넘겨질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표현하지 않게 될 것”이라며 “공익에 관한 진실한 사실마저도 공적 토론의 장에서 사라지게 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 재판관은 “당사자가 아닌 일반 국민의 고발에 의해서도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수사가 시작될 수 있다”며 “공적 사안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봉쇄하기 위한 ‘전략적 봉쇄 소송’마저 가능한 상황”이라고 했다.
재판관들은 ‘사실 적시 명예훼손’을 처벌하는 나라가 거의 없다는 점도 위헌의 근거로 제시했다. 독일과 스위스, 오스트리아는 자신의 표현을 진실이라고 증명하는 경우 처벌할 수 없도록 하고 있고, 일본은 당사자의 신고가 있을 때에만 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수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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