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의 챔피언 희망…삼성생명 돌풍을 보는 다양한 시선[김종석기자의 퀵어시스트]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9일 07시 29분


삼성 프로스포츠 오랜 세월 동반 무관
모처럼 우승 기회에 코트 안팎 관심 증폭

여자프로농구 포스트시즌에서 삼성생명 돌풍의 주역으로 떠오른 김한별. WKBL 제공
여자프로농구 포스트시즌에서 삼성생명 돌풍의 주역으로 떠오른 김한별. WKBL 제공

여자프로농구 삼성생명이 코트에 거센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삼성생명은 KB스타즈와의 챔피언결정전에서 먼저 1차전 승리를 가져왔다. 삼성생명이 챔피언결정전에서 이긴 건 2010년 신한은행을 상대로 승리한 뒤 11년 만이다. 당시 삼성생명은 1승 3패로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번 시즌 정규리그를 4위로 마친 삼성생명은 정규리그 1위 우리은행과의 4강 플레이오프에서는 1차전 패배 후 2,3차전을 내리 이겨 챔피언결정전에서 오르는 이변을 일으켰다. 정규리그 4위 팀이 챔피언결정전에 오른 것은 2001년 이후 20년 만의 일.

정규리그 2위 KB스타즈를 맞아 삼성생명 전력이 한 수 아래라는 평가를 들었으나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 김한별, 배혜윤, 김단비 등이 골고루 활약했고 김보미도 오랜 경험을 살려 후배들을 이끌었다. 역대 여자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에서 첫 승을 거둔 팀이 우승한 확률은 67.8%다. 1,2차전을 모두 이긴 팀은 100% 우승했다. 올해 삼성생명이 우승할 경우 여자프로농구 사상 최초의 정규리그 4위 팀의 챔피언결정전 우승, 정규리그 승률 5할 미만(14승 16패) 팀의 챔프전 우승이 된다.

삼성생명 사령탑은 현대에서 선수 생활을 한 임근배 감독이 맡고 있다. 임 감독은 프로농구 최고 명장으로 꼽히는 유재학 감독 밑에서 10년 넘게 코치로 손발을 맞추며 전성기를 맞기도 했다.

삼성생명은 1998년 여자프로농구 출범 후 2006년 여름리그까지 통산 5차례 챔피언결정전 정상에 오른 뒤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의 초강세에 밀려 우승권에서 멀어져갔다.

여자프로농구 삼성생명 전성기를 이끌었던 박정은(오른쪽)과 이미선. 동아일보 DB
여자프로농구 삼성생명 전성기를 이끌었던 박정은(오른쪽)과 이미선. 동아일보 DB

삼성생명은 한때 여자농구 최고의 명문으로 군림했다. 1977년 이인표 감독과 조승연 코치 체제로 삼성 남자농구단 보다 먼저 창단해 1982년 동방생명으로 소속이 바뀐 뒤 최강의 면모를 과시했다. 1980년대 최고 인기 겨울스포츠였던 농구대잔치에서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삼성생명 구단 홈페이지에 따르면 농구대잔치 통산 8회 우승, 전국체육대회 통산 5회 우승을 달성했다. 성정아, 최경희, 김화순, 차양숙, 정은순, 유영주, 한현선, 왕수진, 박정은, 이미선, 변연하 등 숱한 스타를 배출했다. 한국여자농구가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뒤 2000년 시드니올림픽 4강 진출의 쾌거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삼성생명 소속 지도자와 선수들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프로야구 삼성 선수들이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 통합 4연패를 달성한 뒤 환호하고 있다. 삼성은 넥센을 4승 2패로 꺾었다.  김종원 스포츠동아 기자 won@donga.com
프로야구 삼성 선수들이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 통합 4연패를 달성한 뒤 환호하고 있다. 삼성은 넥센을 4승 2패로 꺾었다. 김종원 스포츠동아 기자 won@donga.com

삼성생명이 무려 15년만의 우승 기회를 잡으면서 삼성그룹 소속 프로스포츠단의 오랜 무관 세월에도 마침표가 찍힐지 관심을 끌고 있다. 삼성그룹 소속 프로스포츠 팀은 여자프로농구, 남자프로농구(삼성 썬더스), 프로축구(수원 삼성), 프로야구(삼성 라이온즈), 남자프로배구(삼성화재)가 있다.

한때 해가지지 않는 왕국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삼성 소속의 5개 프로팀들이 번갈아가며 우승을 밥 먹듯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젠 먼 옛날 스토리가 됐다. 여자프로농구 삼성생명 뿐 아니라 4차례 프로축구 리그 우승을 차지한 수원 삼성은 2008년을 마지막으로 우승 트로피를 안지 못하고 있다. 2014년 한국시리즈 4연패를 달성한 프로야구 삼성은 2015년 한국시리즈 진출을 끝으로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남자프로배구 삼성화재는 8차례 챔피언결정전 우승의 금자탑을 쌓은 왕조였지만 2014년 통합 우승 이후 뒷걸음질쳤다. 이번 시즌 삼성화재는 최하위를 굳혔다. 서울을 연고로 한 남자프로농구 삼성은 김동광 감독 시절인 2001년과 안준호 감독이 지휘봉을 잡던 2006년 두 차례 정상에 오른 뒤 우승 추가를 못하고 있다.

흔히 프로스포츠에서는 ‘돈=성적’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삼성의 부진은 그만큼 투자가 줄어든 영향도 분명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삼성이 프로스포츠에 대한 지원을 줄이기 시작한 2014년을 전후로 성적이 하락세로 돌아섰다는 분석이다. 삼성전자 등 주력 계열사 소속이던 프로 구단을 통합 관리와 시너지 창출 등의 명분에 따라 제일기획으로 편입했지만 오히려 전력 약화를 초래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1980년대 동방생명(삼성생명)의 황금기를 주도한 성정아. 동아일보 DB
1980년대 동방생명(삼성생명)의 황금기를 주도한 성정아. 동아일보 DB

여자농구 동방생명(삼성생명)은 1980년대 최고 유망주이던 고교생 성정아 영입에 총력을 다했다. 당시 동방생명, 태평양화학, 신생 현대가 스카우트 전쟁을 벌였다. 팀마다 현금, 부동산, 체육관 건립(현대) 등 억대가 넘는 조건을 내걸며 과열 양상을 보이자 체육부가 진상조사까지 했다. 관계자에 따르면 성정아가 중학생일 때부터 관심을 보인 태평양은 강남 아파트와 화장품 대리점을 지원하며 공을 들였다. 하지만 최종 선택은 선수 본인이 원했던 동방생명이었다. 동방생명은 태평양에서 지급한 스카우트 비용을 모두 물어주는 등 현금 2억 원 내외의 파격적인 조건으로 계약을 성사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성정아는 동방생명 황금기의 주역이었다. 성정아의 아들은 미국대학농구에서 유망주로 떠오른 이현중이다. 1990년대를 지배한 정은순은 중학교 시절부터 자신에게 월 10만 원의 급식비를 지원하며 인연을 맺은 삼성생명에 1억5000만 원을 받고 입단했다.

특급 스타 싹쓸이의 부작용은 물론 크다. 선수 확보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악의 제국’이 된다면 리그 발전에도 도움이 안 될 수 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스타군단이 꼭 우승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우수 선수 확보 없이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힘들다.

1976년 9월 동아일보 지면에는 삼성 여자농구와 현대 여자배구 창단 소식이 실렸다. “한국 스포츠 육성에 재벌기업이 적극 참여할 뜻을 밝히면서 큰 활력소를 불어넣고 있다. 국내 최대 기업들의 스포츠 참여는 이미 오래전부터 운동부를 육성하고 있는 다른 기업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는 반면 아직도 스포츠를 외면하고 있는 여타기업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 뜻은 매우 크다.”

여자프로농구 삼성생명 선수들이 KB스타즈와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이긴 뒤 기뻐하고 있다. WKBL 제공
여자프로농구 삼성생명 선수들이 KB스타즈와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이긴 뒤 기뻐하고 있다. WKBL 제공

제일주의를 표방하는 삼성의 문패를 단 프로팀이 늘 중하위권을 맴도는 건 장기적으로 한국 스포츠의 전반적인 위축을 부를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국내 대부분 프로팀들은 자생력과는 거리가 멀고 모기업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코트 반란의 새 바람을 일으킨 여자프로농구 삼성생명의 최종 목적지는 어딜까. 열세라는 예상을 깨고 정상 문턱까지 내달린 투혼만큼은 뜨거운 박수가 아깝지 않을 것 같다.

김종석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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