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 여제’ 김연경(33)이 ‘6번 늪’에 빠졌습니다. ‘어우흥’(어차피 우승은 흥국생명)이라는 평가를 받던 흥국생명이 프로배구 2020~2021 V리그 여자부 챔피언결정전(5전 3승제)에서 벼랑 끝에 몰린 이유입니다.
혹시 모르시는 분께 말씀드리면 각 팀은 세트마다 라인업을 제출하며 각 선수는 라인업 순서에 따라 1~6번 자리를 시계방향으로 한 칸씩 옮겨 가면서 경기를 치릅니다.
이를 ‘로테이션’(rotation)이라고 하고 2~4번 자리에 위치한 선수를 전위(前位), 나머지를 후위(後位) 선수라고 부릅니다.
후위 선수는 네트와 어택라인 사이에서 네트보다 높이 있는 공을 건드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선수가 후위에 위치했을 때는 공격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따라서 팀 최고 공격수가 전위에 최대한 오래 머물 수 있는 자리를 고르는 게 라인업을 짜는 기본 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리는 4번입니다. 실제로 이번 시즌 여자부 정규리그 경기 기준으로 4번 자리에서 시작한 선수는 전체 랠리 가운데 54.1%를 전위에서 소화했습니다. 반면 1번 자리에서 시작한 선수는 54%가 후위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V리그에서는 외국인 선수가 4번, 세터가 1번에서 시작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배구 역사를 살펴보면 이 확률 차이 때문에 세터와 대각에 서는 주 공격수 = 라이트가 탄생하게 됐습니다.)
세터가 전위에 있을 때는 전위에 있는 공격수가 두 명뿐이지만 후위에 있으면 공격수 세 명이 전위에 있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넓어지게 됩니다.
● 공격 효율 0.082
그러면 냉정하게 말해 외국인 선수 브루나(22·브라질)가 김연경보다 공격력이 떨어지는 흥국생명은 이번 챔프전 때 어떤 라인업을 짜고 있을까요?
신기하게도(?) 흥국생명 박미희 감독은 챔프전 두 경기 모두 김미연(28)을 4번 자리에 배치한 채 경기를 시작했습니다. 대신 브루나가 3번 자리에서 경기를 시작했습니다. 김연경은 두 경기 모두 6번 자리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레프트 자원인 김미연을 라이트 자리에, 원래 라이트 자원인 브루나를 레프트 자리에 배치하는 ‘변칙 라인업’을 들고나온 겁니다.
이 라인업이 성공적이었다면 좋았겠지만, 결과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역시 김연경이 전위(45.7%)보다 후위(54.3%)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번 챔프전 때 김연경은 일부러 후위에 오래 두려고 1번 자리에 배치하는 세터만큼 오랜 시간을 후위에서 소화해야 했습니다.
플레이오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오프 세 경기를 치르는 동안 김연경은 전체 랠리 가운데 50.1%를 전위에서 49.9%를 후위에서 뛰었습니다. 사실상 반반이었던 것.
그런데 챔프전 때는 특히 6번 자리에 머문 시간이 길었습니다. 이론적으로 계산하면 김연경은 이번 챔프전 기간 전체 랠리 가운데 16.5%를 6번 자리에서 소화해야 했습니다. 실제 결과는 23.1%였습니다.
김연경이 6번 자리에 이렇게 오래 묶여 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김연경이 6번 자리에 있을 때 흥국생명 전위에는 김미연 - 브루나 - 이주아(21)가 들어서게 됩니다.
세 선수는 공격을 총 49번 시도해 13번(26.5%) 성공하는 데 그쳤습니다. 그나마 나머지 36번 가운데 5번은 상대 블로킹에 당했고 4번은 공격 범실로 끝이 났습니다. 그래서 공격 효율로 계산하면 0.082가 전부입니다.
● 차상현의 덫
흥국생명이 이 자리에서 이렇게 부진한 제일 큰 이유는 GS칼텍스 차상현 감독이 이 자리에 덫을 쳐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로테이션 순서 때 GS칼텍스에서는 주로 강소휘(24)가 서브를 넣었습니다. 강소휘는 정규 시즌 때 상대 팀 서브 리시브 효율을 27.1%(3위)로 끌어내리는 ‘강서버’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강소휘 서브 때 GS칼텍스 전위에는 이소영(27) - 러츠(27) - 문명화(26)가 자리 잡게 됩니다.
이러면 먼저 러츠(206cm)와 문명화(189cm)가 높다란 블로킹 벽을 칠 수 있습니다. 또 공이 GS칼텍스 쪽으로 넘어와 반격 기회를 잡았을 때는 팀 내 공격 효율 1위 이소영(0.313)과 2위 러츠(0.303)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 GS칼텍스가 득점에 성공하면 강소휘 서브부터 랠리를 다시 시작해 연속 득점을 노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GS칼텍스는 전체 챔프전 두 경기에서 얻은 전체 150점 가운데 33점(22.0%)을 이 자리에서 뽑아냈습니다. GS칼텍스가 가장 많이 점수를 올린 게 바로 이 자리입니다.
이렇게 GS칼텍스 공격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김연경은 6번 자리 그러니까 후위에 오래 묶여 있게 됩니다.
● 공격 점유율 68.4%, 서브 리시브 점유율 36.7%
김연경이 전위로 올라와도 GS칼텍스의 괴롭힘(?)은 끝나지 않습니다.
김연경은 후위에서 흥국생명 전체 서브 리시브 가운데 18.9%(74개 중 14개)를 책임졌습니다. 전위에서 이 비율은 36.7%(60개 중 22개)로 두 배 가까이 올라갑니다. GS칼텍스 선수들이 김연경을 향해 ‘목적타’를 날렸기 때문입니다.
김연경은 전위에서 서브 리시브 효율 45.5%를 기록하면서 목적타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GS칼텍스 리베로 한다혜(26)가 정규시즌에 기록한 서브 리시브 효율이 45.6%입니다.
문제는 서브 리시브만 잘해서는 점수를 올릴 수 없다는 점. 김연경이 받은 GS칼텍스 서브 22개 중 16개(72.2%)는 김연경의 공격 시도로 이어졌습니다. 이 16개를 포함해 김연경은 팀 전체 공격 시도 79개 가운데 54개(68.4%)를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공격 효율 0.352를 남겼습니다. 정규리그 경기에서 공격 점유율 10% 이상을 기록한 선수 가운데 이보다 공격 효율이 높은 건 0.366을 기록한 양효진(32·현대건설·센터)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김연경은 챔프전 두 경기를 치르는 동안 전위에서 리베로급 서브 리시브 효율을 기록하면서 센터급 공격 효율을 남긴 겁니다. 그것도 100%가 넘는 ‘공격 점유율 + 서브 리시브 점유율’을 기록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배구는 전위에서 한 선수만 잘한다고 이길 수 있는 경기가 아닌데 말입니다.
아, 김연경은 챔프전 두 경기를 합쳐 디그를 19개 성공했습니다. 물론 흥국생명에서 제일 많은 기록입니다.
● ‘배구 여제’ 이대로 안녕?
V리그 무대로 돌아오면서 흥국생명과 1년 계약을 맺은 김연경은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시즌이 끝나면 다시 한국을 떠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흥국생명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1, 2차전 모두 GS칼텍스에 0-3으로 무릎을 꿇은 상황. 30일 안방 구장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리는 3차전마저 내준다면 여자부 이번 시즌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배구는 팀 스포츠고 김연경이 제아무리 ‘끝까지 가자’고 외쳐도 팀 동료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대로 걸음을 멈춰야만 합니다. 과연 팀 동료들이 김연경을 6번 늪에서 건져 올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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