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경제 협력 문제가 나올 때마다 유라시아로 이어지는 철도에 대한 관심이 함께 커지곤 한다. 그 중요한 길목인 러시아 연해주와 북한 사이의 17km 남짓한 국경을 넘어가면 바로 이순신 장군이 여진족과 싸웠던 녹둔도가 있다. 단편적으로만 전해지던 녹둔도의 실체가 최근 발굴로 그 실상이 밝혀지고 있다.》
이름과 달리 녹둔도는 섬이 아니라 서울의 6분의 1 크기에 이르는 거대한 저습지였다. 우리의 국운이 다하던 구한말 러시아에 편입된 이래 지금은 그 흔적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었다. 녹둔도는 조선시대에는 변두리와 오랑캐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유라시아로 이어지는 관문이다. 동시에 중국으로선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차지해야 할 교두보이기도 하다. 이런 현대사적 의의 이전에도 한-러 국경지역은 선사시대 이래 유라시아와 한반도의 고대를 잇는 거점이기도 했다.
역사에서 사라진 녹둔도
녹둔도는 세종대에 6진 4군을 설치하면서 두만강 유역의 둔전으로 우리 역사에서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 이름은 사슴을 뜻하는 여진어에서 유래했는데, 지금도 녹둔도 일대에는 마치 노루의 엉덩이같이 비쭉 솟아오른 수슬로바라는 야산이 남아있다. 저습지와 마른 땅을 반복하던 이 지역을 함경도 주민들이 왕래하며 꽤 거대한 둔전을 일구어 살았다. 그러던 중 이순신 장군이 근무하던 1587년에 현지의 여진족과 ‘녹둔도 전투’가 벌어졌다. 이순신 장군은 백성들의 농사를 보호하기 위해 목책을 비운 사이에 여진족이 침략하여 크게 패했고 이후 반격을 가해 일정한 전과를 올렸다. 비록 전체 전투로 본다면 패배이기 때문에 그 책임을 물어서 ‘백의종군’으로 강등되었지만 그의 능력을 조정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이순신 장군은 정읍현감을 거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발령받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녹둔도 전투는 이순신 장군의 신화가 시작된 곳이지만, 녹둔도 자체는 구한말에 다시 역사에 등장하기 전까지 인적이 끊긴 것은 물론이고 기록도 사라진다.
수백 년간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었지만 정작 그 위치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 의아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것은 두만강 하구의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나는 녹둔도에서 멀지 않은 곳인 발해성터 크라스키노를 발굴한 적이 있다. 이때에도 조금만 땅을 파도 솟아오르는 지하수 때문에 큰 고생을 할 정도였다. 기후가 한랭건조한 시점이 되면 이 지역은 논을 만들기에 아주 좋은 지형이 되지만 조금만 물이 차오르면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진창이 되고 강물의 흐름도 바뀌어 지형이 쉽게 변한다. 여기에 국운이 풍전등화였던 구한말이라는 정치적 상황이 겹쳐 녹둔도는 러시아의 관할이 되었다.
수류봉 산성과 고려인 마을 발견
세종대 6진을 설치할 때 녹둔도에는 토성을 쌓고 목책을 둘렀는데 그 길이가 약 360m(1247척)에 불과했다. 서울 6분의 1 크기의 넓은 소택지인 녹둔도에서 이 정도의 작은 성터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조선왕조실록 성종편에는 녹둔도의 마을이 ‘진흙이 없어 풀이나 지푸라기를 모래에 섞어서 집을 지어 바람이 불면 사라져 버린다’고 되어 있으니 우리의 기대와 달리 녹둔도 일대에서 그 유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더욱이 이 지역은 한국 중국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걸린 첨예한 국경지역으로 외국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는 곳이니 의욕만 앞세우다간 분쟁만 일으킬 여지도 많다.
우리에겐 너무나 궁금한 녹둔도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 것은 러시아 학자들이었다. 2016년 11월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학회에서 러시아 지인들은 고대하던 이 지역의 발굴 성과를 소개했다. ‘수류봉(水流峰) 산성’이라 불리는 둘레가 2.5km인 성터였다. 이 유적은 공교롭게도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으로 양분돼 하나의 유적이 중국과 러시아에서 동시에 문화유적으로 등록된 유일한 사례이다. 이 지역은 녹둔도의 평원과 멀리 동해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실제로 1937년 일본 관동군과 소련군이 벌인 하산전투(일명 장고봉전투)의 전장으로도 유명하다. 러시아 학자들은 조사가 어려운 저지대 대신에 당시 군사적 요충지인 수류봉을 조사하였고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유물들과 함께 ‘대왕(大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도 발견했다. 물론 ‘대왕’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조선만의 풍습은 아니지만 정황상 세종 때 설치한 6진과 관련한 큰 군사적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러시아 학계의 1차 결론이었다. 물론 아직 발굴이 극히 일부만 되었으니 함부로 결론을 내긴 어렵다. 현재로서는 수류봉 성터는 조선시대 두만강 건너편으로의 진출 과정을 실증적으로 밝혀줄 첫 번째 증거인 셈이니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유라시아로의 진출을 증명하는 최초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사실 이 일대에는 수류봉 산성만이 아니라 조선인의 마을터가 군데군데 남아있다. 그뿐이 아니다. 이 지역에는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를 이어 옥저와 고구려를 거쳐 발해에 이르는 유적들이 남아있다. 단기간에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 중기 녹둔도는 규모가 작았고 임시로 살던 성격이 강했다. 그 대신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동안 유라시아와 한국을 이어온 두만강 유역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韓-유라시아의 가교
녹둔도에 관심을 보이는 나라는 한국만이 아니다. 한국과 러시아의 국경 때문에 태평양으로 가는 관문이 막혀 버린 중국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21세기 정치적인 요충지이다. 바로 녹둔도는 17km로 이어지는 한국과 유라시아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남북 경제 협력이 거론될 때마다 유라시아 철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결국 한국과 러시아가 두만강 하구의 짧은 17km를 두고 국경을 접하기에 가능하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한국과 유라시아의 연결이 바로 이 녹둔도를 통해 이어진다. 녹둔도에서 북방의 여진족을 막던 이순신 장군은 곧바로 남해에서 왜적에 대비해야 했다. 대륙과 해양세력의 중간에서 존재를 지켜왔던 우리 역사의 상징적인 모습이다. 녹둔도의 의미는 단순한 잃어버린 영토를 넘어 우리에겐 유라시아로의 관문이다. 녹둔도가 갖고 있는 진정한 우리 시대의 의미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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