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빚을 책 빛으로[관계의 재발견]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16일 03시 00분





고수리 에세이스트
고수리 에세이스트
책 한 권 살 수 없는 가난한 청춘을 보냈다. 돈을 모으느라 돈과 시간이 없었다. 넘치는 야망을 껴안기에 현실은 너무 좁고 작았다.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어서 도서관에 있던 여행책을 모조리 읽어버렸던 나는, 가난하고 뜨거운 청년이었다.

그러나 나에겐 책 잘 사주는 선배가 있었다. 우연히 서로의 글을 읽고 교우하게 된 김 선배는 주변에서 유일하게 글을 쓰는 사람, 걸어갈 때도 밥 먹을 때도 책을 읽는 사람이었다. 선배는 나에게 밥보다 책을 사주었다. 한번 읽어보라며 새 책을 선물할 때도, 이 책 좋다며 선뜻 읽던 책을 내어줄 때도 있었다. 하루는 그가 “어떤 소설가의 첫 소설집인데 네가 아주 좋아할 것 같아. 나중에 네가 이런 글을 썼으면 좋겠다”라며 책을 내밀었다.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였다. 나는 그 책을 끌어안고, 충격과 질투와 행복과 용기와 희망을 품었다.

만날 때마다 책 사주는 김 선배 덕분에 나에겐 ‘소장 책’들이 생겼다. 곰팡이 핀 방과 방을 전전하던 나에게도 가진 책이 있다는 건 가슴 뻐근하게 황홀한 일이었다. 외롭고 캄캄한 날에도 나는 문장들과 대화했다. 선배는 사회인이 되고서도 책을 보내주었다. 네가 계속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도 말해주었다. 생각해보면 겨우 서너 살 많았던 선배도 학생이었고 사회 초년생이었다. 허물없이 책을 선물하는 일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글쓰기와 전혀 관련 없는 전공을 하고 일반 직장을 다니면서도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건, 이 우정의 영향이 크다. 나는 선배에게 책 빚을 지었다고 내내 생각했다.

훗날 우리는 둘 다 책을 낸 작가가 되었다. 선배의 첫 책을 받아보았을 때, 그에게 진 빚을 갚아야겠다고 다짐했다. SNS 작가 계정에 이 이야기를 적었다. 그리고 내가 읽은 좋은 책을 두 권씩 골라서 보내줄 테니, 받고 싶은 청년들은 주저 말고 메시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한 시간 만에 열일곱 명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꿈과 고민과 마음을 전하는 그들에게서 과거의 나를 보았다. 나는 청년들에게 책을 골라 보내주었다. “사람의 태도는 짧은 대화나 책 한 구절로도 변할 수 있다”라는 제인 구달의 말을 함께 적어서.

얼마 후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작가님이 보내주신 책을 읽으며 생각하는 시간을 거치다가 꼭 평생 머물고 싶은 분야를 찾았어요. 감사합니다.” 반짝, 마음에 빛이 들었다. 그 빛이 너무 눈부시고 따뜻해서 선배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당신에게 받았던 ‘책 빚’을 다른 이에게 ‘책 빛’으로 갚았노라고. 나는 믿는다. 책 한 권으로도 사람은 변할 수 있다. 책 한 권으로도 사람을 구할 수 있다.

고수리 에세이스트
#관계의 재발견#책 잘 사주는 선배#소장 책#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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