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11월 경성 광희문 밖 신당리를 찾아간 동아일보 기자에게 주민들이 털어놓습니다. 신당리는 동아일보가 11월 7일자부터 7회 연재한 ‘빈민촌 탐방기’에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었죠.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으로 농촌에서 밀려난 농민들이 모여든 대표적 지역이었습니다. 1924년 같은 지독한 가뭄은 도시 이주를 더 강하게 몰아붙였죠. 1925~1930년에 매년 4만 명이 농촌을 떠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시는 절망 속 농민들을 받아주는 넓은 품이 아니었죠. 가장자리에 멈춰선 이들은 언덕이나 산비탈, 성벽 밑에 흙을 파낸 뒤 바닥에 멍석을 깔고 위에도 이리저리 거적을 덧댄 ‘집 아닌 집’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토막(土幕)’입니다. 땅은 누구 소유건 상관하지 않았죠. 이내 토막 옆에 토막이 하나둘 이어지는 토막촌이 형성됩니다. 토막이라는 말은 일제가 나라를 빼앗은 1910년 무렵까지는 사용되지 않았다고 하니 새로운 현상이었죠.
토막이 300여 채 들어선 신당리는 3년 전만해도 별로 사람이 살지 않았습니다. 이젠 콧구멍만한 방에 무려 네 가족까지 살을 맞대며 생활했죠. 기름때 절은 누더기 이불 하나로 딸, 아버지, 며느리 할 것 없이 잠을 잤습니다. 일 년 가도 흰 쌀밥과 고기는 구경하지 못한 채 죽을 먹었고요. 그나마 아침과 저녁뿐이었죠. 금 간 바가지는 밥그릇도 됐다가 설거지통도 되고 손과 발 씻는 대야 노릇도 했습니다. 비라도 오면 방바닥은 금세 진흙밭이 됐죠.
조각보 같은 누더기 옷에는 이가 들끓어 틈만 나면 손톱으로 눌러 죽이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학교엔 근처도 가보지 못한 아이들은 커서 부모처럼 지게꾼이 되고 막벌이꾼이 돼 빈곤을 물려받게 될 운명이었죠. 소설가 현진건이 1924년 발표한 ‘운수 좋은 날’의 주인공 인력거꾼은 토막민보다는 형편이 나았습니다. 동대문 밖 공동묘지에 들어선 토막촌의 한 노파는 “아이고 이제는 너무 추워서 머리가 다 아파 죽을 지경”이라고 울음 섞인 넋두리를 했죠.
토막민 같은 빈민들은 아플 때 굶주림 못지않은 고통을 느낍니다. 참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동아일보는 이 해 7월 초 여름 순회진료강연단을 꾸렸습니다. 조선총독부의원 의사 4명과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8명으로 2개 반을 편성해 10일 간 남북으로 각각 진료와 위생강연을 구상했죠. 지면에 알림과 사설까지 내면서 추진했지만 출발 직전 총독부가 불허 결정을 내렸습니다. 동아일보의 약속을 믿고 기대한 이들의 허탈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동아일보는 취재한 그대로를 7월 14일자에 실었습니다. 위생과장은 도마다 (무료 진료해주는) 자혜의원이 있고 군마다 공의(公醫)가 있으니 순회진료는 필요 없다고 했죠. 순회진료를 하더라도 신문사 계획을 따를 일은 아니라는 말이 진짜 속내였을 겁니다. 기어이 하려거든 개업 의사를 불러 하라고 했죠. 총독부의원 의사는 안 된다는 겁니다. 작년에 오사카마이니치의 순회진료는 왜 허락했느냐고 되묻자 ‘그땐 책임자가 달랐고 작년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했죠.
총독부의원 소속이라도 휴가를 내고 가는데 왜 그러느냐고 다시 묻자 ‘휴가 중이라도 총독부의원 소속이지 않느냐’고 억지를 부립니다. 총독부의원과 경성의학전문학교는 이미 허락했다고 하자 ‘두 기관이 마음대로 허락할 수 없는 일’이라고 대답하죠. 민간사업이지만 취지가 좋으니 총독부의원 의사라고 안 될 이유는 없지 않느냐고 끈질기게 따지자 대답이 막힌 위생과장은 ‘경무국장의 결정’이라며 떠넘기고 맙니다.
동아일보는 이해 12월 25일자 사설에서 걸인이 생기는 원인은 개인이 아니라 걸인을 만들어낸 사회조직이나 경제조직에 가장 큰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당시 영국이 시행한 걸인 구제책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다고 소개했죠. 하지만 총독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걸인이나 빈민은 보이지 않게 눈앞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원칙이 총독부의 방침이었죠. 일제강점기 내내 빈민이 늘어나게 된 배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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