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과 우울의 정서를 탁월한 대중성과 접목하는 독보적 싱어송라이터 이이언(밴드 ‘못’ ‘나이트오프’ 리더)이 9년 만의 솔로 정규작인 2집 ‘Fragile’로 돌아온다.(30일 발매)
11개의 신곡을 미리 들어봤다. 창백한 푸른색 얼음송곳으로 된 기암의 정원을 산책하는 듯했다. 손끝만 스쳐도 뜨거운 피가 흐를 듯한 위태로운 온도의 절벽…. 아름답게 뒤틀린 음표들은 진갈색 코냑처럼 독하고 향기롭다.
“1집 ‘Guilt-Free’(2012년)를 만들 때 저를 사로잡은 화두는 죄책감이었죠. 2집 ‘Fragile’의 주제는 제목처럼 인간 영혼의 연약함입니다.”
19일 오후 만난 이이언은 “2019년 1∼9월 공황장애를 앓은 뒤 활동이 버거워 음악을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증세를 극복한 뒤 오랜 세월 스스로를 옭아맨 창작의 제약과 강박에서 벗어나 새 길을 찾았다”고 말했다.
이이언 2집은 국내외에 큰 화제를 불러올 것 같다. 첫 곡이자 타이틀곡인 ‘그러지 마’에 방탄소년단의 리더 RM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RM은 이이언의 오랜 팬이다. 수년 전, RM이 트위터로 이이언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됐다.
비극적 사랑의 종말을 다룬 애절한 곡 ‘그러지 마’에서 RM은 특유의 중저음으로 노래한다.
‘파도는 원래 무슨 색일까요/부서질 땐 새하얗잖아요’ ‘여기 조약돌로 남아주면 안 돼요/달을 켜줘요’….
“어떤 지시나 조언도 없이 ‘이 부분이 네 파트야’ 하고 RM에게 반주를 건넸는데 가사와 멜로디는 물론 보컬 편곡까지 완벽하게 해서 건네더군요. 최종 결과물을 들려주니 RM이 ‘이렇게 만족스러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다. 좋은 음악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해서 저도 아주 흡족했어요.”
난파할 듯 여린 서정을 날카로운 선율로 빚은 신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음악적 요소는 기이한 반음계 사용, 네온처럼 흐르는 포르타멘토(미끄러지듯 연주하기) 기법, “드럼의 하이햇을 미분해 밀고 당기는 브로큰(broken) 비트”이다.
“‘그냥’에서는 가사의 각운(‘그냥’ ‘모양’ ‘잔향’ 등)에 맞춰 ‘단2도-으뜸음’의 멜로디를 붙여 활시위가 당겨지는 듯한 느낌을 줬어요.”
‘Null’ ‘Mad Tea Party’ ‘어쩌면’ 같은 곡에 도배된 반음 간격의 음표 릴레이는 나선 계단 아래로 미끄러지는 롤러코스터처럼 아찔하다.
“‘많은 밤을 지나’에서는 불안한 5박자에 맞춰 싱잉 랩 비슷한 것도 시도했죠.”
그간 록, 재즈, 전자음악을 섞어 독창적 설계도를 그렸던 이이언은 신작에 트랩(trap), 이모 랩(emo rap) 등 힙합과 R&B의 어휘를 대거 도입했다. 래퍼 스월비, 제이클레프도 참여시켰다.
“주노(Juno), 프라핏(Prophet), 야마하 DX7 등 1980년대식 신시사이저도 많이 썼어요. 신스팝, 드림 팝 장르의 전형적 악기를 트립 합, 힙합의 분위기에 접목해 특이한 조합을 만들어봤죠.”
천재 음악가로 통하는 이이언은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2019년 심신의 고통을 겪기 전까지는 스스로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노력으로 커버하는 기분이었죠. 이제 제 음악이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것을 느껴요. 작곡 속도도 1집 때의 7, 8배 수준으로 빨라졌습니다.”
‘왜일까’에서 이이언은 끝없이 의문문을 던진다. ‘밤은 지워진 낮일까/삶은 덜 마른 꿈일까’ ‘왜일까/왜 사라지는 게 예쁠까/왜 아름다운 게 슬플까’ ‘새는 바람이 쉬울까’….
질문, 혼돈, 토로로 점철된 앨범의 말미에 배치한 ‘우리 함께 길을 잃어요’ ‘언제까지나 우린’에서 이이언은 연약한 이들의 연대를 스케치한다. 희망의 여지를 열어둔다.
신작 ‘Fragile’의 디지털 음원은 30일 오후 6시에 국내외 주요 음악 플랫폼에서 공개된다. 하반기에는 LP레코드로도 발매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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