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쿠체의 소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들녘·왕은철 옮김·2005년)의 주인공인 호주의 저명한 60대 여성 소설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다. 그녀는 세계를 여행하면서 리얼리즘, 동물, 인간, 채식, 악, 신을 비롯한 다양한 주제로 강연한다. 그녀는 젊은 시절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재조명하는 소설을 쓰면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딜 가나 입장을 요구받는 늙고 지치고 냉소적이고 예민한 소설가가 되어 지난 삶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있다.
코스텔로는 많은 이들의 존경과 관심을 받고 있지만, 평생 매달려온 글쓰기에 대해 회의하고 다른 사람들의 비판으로 불안에 시달린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중에서 그녀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은 없다. 물리학 교수인 아들은 어머니의 전달력이 약하다고 무시하고, 정신철학 박사인 며느리는 강연 도중에 코웃음을 친다. 동물을 참혹하게 죽이는 도살장은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나치와 다르지 않으며, 인간과 짐승을 가르는 구분 자체를 다시 사유해야 한다는 코스텔로의 주장은 강연 중 맹렬한 반기에 부딪치거나 손쉽게 왜곡된다.
흥미롭게도 소설은 주인공인 코스텔로의 논리에 그다지 힘을 싣지 않는다. 그녀의 주장 역시 말끔하거나 완벽하지 않으며 종종 모순을 보인다. 게다가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발언이 꽤나 설득력 있게 짜여 있고 그 비중도 크다. 왜일까? 소설이 긴장감 있는 대화의 생동을 보여준다는 견해도 가능하겠지만, 이 대화는 탄력 있다기보다는 다소 지쳐 보이고 조금은 슬퍼 보인다. 코스텔로의 세계는 더 이상 타인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와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들로 가득 찬 바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코스텔로의 결론이 아니다. 리얼리즘, 동물, 인간, 채식, 악, 신에 대한 ‘주장’을 하기 위해 이 소설이 쓰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설은 그녀의 발언이 어떻게 단순화되거나 잘못 이해되어 가는지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정교하게 따라간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맥락의 주름을 세세하게 펼쳐 보인다. 이 각축장 안에 절대적인 믿음은 없으며, 그러한 믿음은 제출되는 족족 심문에 부쳐진다.
이 결론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모든 회의, 비난, 불안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다다른 법정에서 그녀가 믿음에 대해 열변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믿음을 향한 이 강렬한 희구는 코스텔로의 무력하고 불안한 혼잣말, 무례하게 제기되는 반론들, 그리고 이를 하나로 엮어내는 이 소설의 형식과 무관하지 않다. 절박한 믿음과 집요한 의심은 떼어낼 수 없는 한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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