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담은커녕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많이 없어서 얼마나 미안한지 몰라요.”
피치 못할 사정으로 부모 등의 빚을 물려받고선 법적으로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고통받는 아이들. 세상엔 그런 아이들을 위해 조용히 애쓰는 이들도 있다.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도 그렇다. 지난해 7월부터 관련 미성년자들을 위해 무료 법률 지원을 해왔다. 하지만 센터장을 맡고 있는 이상훈 변호사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하정이(가명·8)만 해도 할아버님 뵐 낯이 없습니다. 현행 민법에 미성년 상속인에 대한 보호 장치가 없어 방법이 없어요. 이제 남은 건 개인 파산뿐이거든요…. 딸이 떠나고 손녀를 어떻게든 잘 키우시려 하셨는데, 너무 크게 낙담하셨어요.”
하정이는 2019년 갑작스레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 카드 빚 5000여만 원을 물려받았다. 외할아버지(69)는 손녀를 책임지려 법정 후견인이 됐지만, 빚을 막아주진 못했다. 부채를 인지한 때부터 3개월 안에 했어야 할 상속 포기를 신청하지 않아서다. 그런 법이 있는지도 몰랐던 할아버지는 뒤늦게 센터를 찾았지만 시기를 놓쳐버렸다.
여덟 살의 어린 손녀가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걸 안 순간, 할아버지는 마음의 문이 닫혀버렸다. 거동이 불편한데도 직접 생경한 서류를 챙겨들고 법원을 찾아다녔던 그였다. 불쌍한 손녀를 보듬어 줄 것이라 믿었던 법에 배신당한 심정이었다.
“전화를 드려도 안 받으시고, 집으로 찾아봬도 만나주질 않으시네요. 그 심정 알죠. 벽에 탁 가로막힌 기분이실 거예요. 하정이를 지켜줬어야 할 법이 오히려 외면해버렸으니까요. 어른들 잘못으로 아이 앞길을 망친 기분입니다.”
이 변호사는 조만간 하정이네 집에 또 찾아갈 계획이다. 센터 측은 “소속 변호사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문제로 외근을 나간다. 빚을 물려받고 자포자기하는 아이와 보호자를 설득하려면 만나서 얘기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이달 10일 국회에선 뒤늦게나마 미성년자가 재산보다 큰 빚은 물려받지 않도록 하는 법률개정안이 발의됐다. 이 법이 통과되면 빚을 물려받은 아이들이 빚쟁이로 전락해 성인이 돼도 괴롭힘을 당하는 일은 사라진다. 당하는 이들도 도와주는 이들도 마음이 아픈 이 굴레를 이젠 정부와 국회가 나서서 벗겨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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