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소니그룹의 올해 경영방침 발표를 보면서 ‘소니의 경쟁사’를 어디로 봐야 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1990년대에 대학을 다닌 기자는 ‘소니’란 이름을 들으면 ‘워크맨’부터 떠올린다. 대학 입학 후 서울 황학동 청계고가 아래에서 중고 워크맨을 샀을 때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집에서 듣던 음악을 걸어 다니며 들을 수 있는 신세계가 열렸다.
그런 소니는 1980, 90년대 세계 가전시장을 주름잡았다. 오디오, TV, 컴퓨터 등 소니 가전은 고가였고, 전자매장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혁신적 제품을 내놓지 못했다. 가전이 포함된 전자사업은 2009년부터 2014년까지 6년 동안 다섯 차례 적자를 냈다. 실적이 곤두박질치자 2014년 컴퓨터 사업을 접었고, TV 사업을 분사시켰다. 당시 소니의 경쟁사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승승장구했다.
현재 소니를 가전회사라고 부르기 힘들다. 2000년 회사 전체 매출에서 전자사업 비중이 69%였지만 지난해에는 21%에 불과했다. 그 대신 지난해 게임 30%, 음악 11%, 영상 8% 등 콘텐츠 관련 사업이 전체의 49%를 차지했다. 요시다 겐이치로(吉田憲一郞)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26일 “(게임, 영화, 음악 등) 콘텐츠를 만들고 전달하는 기술을 중시한다”며 소니가 콘텐츠 기업임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 소니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은 역대 일본 영화 흥행 1위에 올랐고, 조만간 게임으로도 만들어진다. 지난해 11월 나온 콘솔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5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덕분에 지난해 1조1717억 엔(약 12조 원)의 순이익을 올려 1946년 창업 이래 최대 기록을 세웠다. 일본 언론은 ‘소니의 부활’을 보도하고 있다. 현재 소니의 경쟁사는 CJ그룹으로 봐야 할 것 같다.
물론 지난해 소니의 호실적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집콕’ 수요의 혜택을 입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일시적 현상”이라는 분석도 내놓는다. 그럼 미래의 성장 가능성은 어떨까. 기자는 가전기업, 아니 콘텐츠 기업 소니가 만든 전기차 ‘비전S’를 주목한다.
소니는 지난해 1월 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0’에서 비전S를 공개했고, 현재 자율주행 등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판매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지만 가와니시 이즈미(川西泉) 전기차 개발 담당임원은 최근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판매 가능성이 제로(0)라고는 말하지 않겠다”며 말을 바꿨다.
비전S에는 주변을 360도 감지할 수 있는 센서 40개가 장착돼 있어 자율주행을 할 수 있다. 차에선 음악과 동영상, 게임 등을 즐길 수 있다. 소니가 현재 지닌 강점인 영상·음향(AV), 이미지센서 등 기술력을 자동차에 접목하고 있는 것이다. 소니는 자동운전 소프트웨어와 차체 디자인, 내장을 맡고, 나머지 주행과 관련된 부분은 다른 기업과 협업하고 있다.
소니 창업주 이부카 마사루(井深大·1908∼1997)는 “10년, 20년이 아니라 30년 뒤, 40년 뒤를 보라”고 주문했다. 소니의 전기차 실험은 그 정신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미래 소니의 경쟁사는 현대차로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일본의 자존심 소니를 꺾었다”고 말한다면, 그는 소니의 변신을 모른 채 과거만 기억하는 사람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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