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이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다. 황선미 작가의 ‘마당을 나온 암탉’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작가의 의도는 ‘뭔가를 하고 싶었지만 그걸 이루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고민해보고 노력해보고 최선을 다했으나 다 갖지 못하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는 독자들이 모성애에 초점을 맞추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의미는 독자들에 의해 생성되는 거다. 작품이 세상에 나가면 작가도 어차피 한 명의 독자일 따름이다.
실제로 소설은 모성애가 주제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양계장에서 버린 암탉이 오리가 낳은 알을 품어 엄마가 된다. 자기가 낳은 알은 아니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품었으니 자기 새끼다. 암탉은 배가 아니라 가슴으로 낳은 아이에게 진짜보다 더 엄마 같은 엄마가 되어 금이야 옥이야 길러서 세상에 내어놓는 인간을 닮았다. 아니, 그 이상이다. 암탉은 오리를 안전하게 떠나보낸 후 족제비에게 자신을 내어준다. “자, 나를 잡아먹어라. 그래서 네 아기들 배를 채워라.” 그는 자식을 위해 헌신하다가 마지막에는 족제비 새끼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준다. 누군가의 자식이거나 부모일 독자들이 이 소설에 감동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소설을 읽으며 애써 외면하는 것이 있다. 인간의 폭력성이다. 주인공 암탉이 누구인가. 양계장 철조망 안에 갇혀 일 년 열두 달 알을 낳다가, 알을 못 낳게 되자 버려진 닭 즉 폐계(廢鷄)다. 인간이 그러한 닭과 동물을 사육하며 박탈하는 것은 새끼를 낳아 기르는 기본권이다. 스스로는 모성애의 가치를 받들면서 다른 생명에게서는 모성애를 박탈하다니 소설 속의 족제비와 뭐가 다른가. 그래도 족제비는 먹이사슬에 갇혀 그렇지만 인간은 다르다. 이렇게 보면 ‘마당을 나온 암탉’은 인간의 폭력성을 환기하는 불편한 소설이 된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러한 윤리적 불편함을 바닥에 깔고 있는 게 이 소설의 장점이자 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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