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1심 법원이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018년 10월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에서 “일본 기업이 각 1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과 배치되는 결과다.
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부장판사 김양호)는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85억 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고 제기한 소송에서 “피해자의 소를 각하한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 3년 전 대법 판결과 정반대 결론
핵심 쟁점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대한 해석이다. 당시 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의 정신적 손해배상(위자료) 청구권 문제가 해결됐는지를 두고 판단이 엇갈린 것이다. 당시 청구권협정은 “양국 국가와 국민의 재산과 권리, 이익에 대한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해결됐다”며 “징용된 한국인이 받지 못한 임금 등(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도 합의사항에 포함됐다”고 적시했다.
이번 1심 재판부는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중 소수의견(대법관 2명)의 법리를 차용해 “피해자의 위자료 청구권은 청구권협정에 의해 완전히 해결됐다”고 봤다. 재판부는 “한국은 1965년 협정 체결 전 한일 회담에서 징용된 한국인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며 “2007∼2010년 국내법을 만들어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했으므로 한국은 위자료 청구권이 청구권협정에 의해 없어졌다고 전제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반면 3년 전 대법원 전원합의체 다수의견(대법관 7명)은 청구권협정에 위자료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피해자들은 태평양전쟁 중 강제로 제철소 등에 동원됐고 가족과 이별해 생명의 위협을 당했다”며 “일본이 이 같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한 상태로 임한 협상이 아니었으므로 징용 피해자들의 위자료 청구권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봤다. 그러면서 당시 일본이 강제징용에 대한 법적 배상을 부인했기 때문에 청구권협정에 의해 돈을 지급했더라도 한일 양국의 정치적 합의였을 뿐 손해에 대한 법적 배상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 피해자 측 소란 우려해 선고기일 기습 변경
재판부는 국제 정세를 고려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을 허락해선 안 된다는 주장도 폈다. “피해자들이 승소해 강제 집행이 이뤄질 경우 국제사법재판소로 회부될 것이고, 여기서 패소할 경우 한국의 위신이 추락하며 서방 세력의 대표 일본, 한미동맹으로 이어진 미국과의 관계도 훼손돼 헌법상 안전 보장이 훼손된다”고 한 것이다.
재판부는 당초 10일로 예정돼 있던 선고 기일을 이날 오전 갑자기 변경했다. “법정의 평온과 안정 등을 위해서”라는 게 이유였다. 피해자 측의 반발과 소란을 예상해 기습적으로 일정을 바꾼 것이다. 고령인 피해자와 유족 측 대부분은 갑자기 일정이 변경돼 재판에 참석하지 못했다.
강제징용 피해자 측은 “대법원 판결과 반대되는 결론에 즉각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도 “새로운 법리 없이 대법원 판결을 거스르며 국가적 이익 등 비법률적, 비본질적 근거를 들어 판결을 선고했다”고 비판했다.
항소심 재판에서는 2018년 대법원 다수의견대로 결론이 다시 뒤집힐 가능성이 높다. 한 고위 법관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대법원 전합에서 결론 낸 동일 사안에 대해 하급심이 배치된 결론을 내는 것은 드물다”고 했다.
외교부는 이날 판결에 대해 “사법 판결과 피해자 권리를 존중하고 한일 관계 등을 고려하면서 양국 정부와 모든 당사자가 수용 가능한 합리적 해결방안을 논의하는 데 대해 열린 입장으로 일본 측과 관련 협의를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의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은 “일한(한일) 관계는 위안부 문제 등으로 인해 매우 엄중한 상황이다. 양국 간 현안 해결을 위해 한국이 책임지고 대응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며 “현안 해결을 위해 한국 측의 구체적인 제안을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