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버로 방송 일을 하면서 여러 채널에서 흥미롭고 다양한 섭외를 받는다. 나로선 큰 행운이다. 그중 몇 달 전에 참여한 작업이 아직도 크게 인상에 남아 소개하고자 한다. 조금 쑥스럽지만 패션쇼 촬영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현대적으로 바꾼 개량 한복 패션쇼였다.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입을 수 있고 휴가철, 심지어는 스포츠를 할 때에도 편히 입을 수 있는 모던 한복이다.
솔직히 말하면 섭외 요청을 받았을 때 잠시 고민했다. 외국인이 한복을 입은 모습이 어색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복을 입는 모습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는 편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이 같은 행동이 무례하다고 비판받을 수 있다. 나 역시 외국인으로서 한복을 평상복처럼 입는 다른 외국인을 보면서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았지만 외국인으로서 혹시 한복의 ‘문화적 도용(cultural appropriation)’을 저지르는 게 아닐지 눈치가 보이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여차저차 한국 친구들의 의견도 묻고 숙고한 끝에 참여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한 것 같다. 촬영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스스로도 한복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여러 분야로 나뉘어 촬영이 진행됐는데, 내가 찍은 파트는 스포츠 한복 분야였다. 결혼식장에서 입는 한복을 떠올리면 어떻게 한복을 입고 운동할 수 있을까 의아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과거 한복을 입고 제기차기, 투호, 널뛰기, 그네타기 등 전통놀이를 즐겼다는 것을 생각하면 좀 더 일상복처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복을 세계무대까지 진출시키기 위한 첫걸음은 우리 생각을 바꾸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복을 명절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고, 박물관이나 민속촌에서만 볼 수 있는 의상으로 취급해 버리는 것 말이다. 내가 입은 스포츠 한복은 생각보다 편하고 예뻤다. 어떻게 한복을 이렇게 바꿀 수 있을까 감탄했다. 디자이너분이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한국을 ‘쿨(cool·멋진)’한 나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시대에 한류의 기세를 전통의상에까지 확대하려는 노력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심지어 방탄소년단(BTS) 뮤직 비디오에도 멤버들이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등장하니 외국인들의 눈에도 한복이 쿨해 보일 것이다. 이런 커다란 흐름에 내가 동참하게 됐으니…. 촬영을 하면서 어깨가 으쓱해졌다.
공교롭게도 촬영을 마치고 며칠 후 한복과 관련한 재미있는 기사를 보았다. 내가 영국에서 응원하는 축구팀은 ‘셰필드 웬즈데이(Sheffield Wednesday)’다. 이 팀은 내가 한국에서 응원하는 ‘FC서울’만큼 유명하진 않다. 설상가상 웬즈데이 팀은 최근 한 단계 낮은 리그로 강등돼 한국 축구팬들이 내 영국 축구팀을 응원할 확률이 더 낮아졌다.
그런데 이런 성적 부진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인지 웬즈데이 팀이 유니폼을 교체한다는 내용이 기사의 요지였다. 웬즈데이의 유니폼은 파란색과 하얀색 세로무늬가 섞여 있고 가슴에 부엉이 모양 웬즈데이 엠블럼이 새겨진 기본형과 방문경기용 핑크색 유니폼 등 두 가지가 있다.
이 디자인은 몇 년마다 조금씩 바뀌는데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디자인은 목 부분이 몇 주 전 내가 촬영했던 현대적 한복과 비슷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에는 새로운 유니폼이 “우아한 한국적 스타일로서 목 부분에서 단추를 끼우는 형식의 깃(stylish Korean neck, button-down collar)”으로 디자인됐다고 묘사됐다.
내가 과민 반응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우연이라고 넘어가기엔 연관성이 너무나 커 보였다. 내 영국 축구팀과 한국적 디자인의 만남이라니! 한국 전통의상을 세계로 알리는 데 내가 응원하는 축구 팀까지 도와주는 것 같아서 신이 났다.
내가 촬영에 참가한 그 모던 한복은 온라인에서도 주문이 가능하다. 촬영 날 같이 패션쇼에 참가했던 다른 모델이 예쁜 개량 한복 드레스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단아하고 시원해 보여서 하나 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만 가격이 좀 비싸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웬즈데이 팀의 새 유니폼 대신 그 셔츠를 사 입고, 한국적 디자인의 세계화를 위해 힘쓰는 BTS의 노력에 나도 슬그머니 숟가락을 얹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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