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8세기 후반 제작된 신윤복(1758∼?)의 ‘연소답청(年少踏靑)’은 봄을 맞이한 젊은이들이 교외에 나가 푸른 풀을 밟는 답청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천민인 기생들이 말에 타고, 나이 어린 양반 집안 자제들은 담뱃대 시중을 든다. 신분제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남녀가 어울리는 시간을 갖고자 했던 청춘들의 설렘이 그림에서 새어나오는 듯하다.
‘사랑에 밑줄친 한국사’는 역사 속 사랑이야기에 주목한다. 저자에 따르면 사건 중심인 역사의 행간을 채우는 것은 개인들의 사연이다. 특히 저자는 역사 속 인물들의 로맨스, 스캔들을 소개해 그 시대의 풍경을 보여준다.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율곡 이이(1536∼1584)는 기생을 향한 ‘플라토닉 사랑’을 펼쳤다. 1574년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이이는 기생 유지에게 흠뻑 빠진다. 이이는 기생의 딸로 태어난 유지에게 측은함을 느끼고 수청을 들게 하는 대신 학문을 전수해준다. 그것도 잠시. 이이가 떠나고, 그들은 9년이 지나 다시 만난다. 여전히 서로가 서로를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이이는 유지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완곡한 거절과 내세의 인연을 약속하는 연서를 남기고 4개월 뒤 세상을 떠난다.
파격적인 밀애도 있다. 1417년 태종 때 환관 정사징은 왕의 형님의 첩, 상왕 정종의 시녀와 간통했다. 1425년 세종 때는 시녀 내은이가 왕이 쓰던 푸른 옥관자(망건에 다는 작은 고리)를 훔쳐 환관 손생에게 준 일도 있었다. 신분상 왕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온갖 욕망을 참고 살아야만 했던 이들의 일탈인 셈이다.
걸출한 예술가이자 학자가 아내에게는 온갖 어리광과 투정을 부린 귀여운(?) 이야기도 있다. 1840년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 제주도에서 9년간 귀양살이를 한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아내에게 쓴 편지를 온갖 반찬 투정과 힘들다는 어리광으로 도배한다. 떨어져 있어도 추사의 요구 사항을 다 들어주던 부인 예안 이씨는 끝내 추사의 마지막 편지를 읽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추사는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부인의 부고를 접했다.
이런 사랑 이야기 속에는 ‘주자학의 나라’였던 조선의 가부장적 이념이 녹아있다. 여성은 기생으로서 수청을 들어야 했고, 부인으로서 남편을 뒷바라지해야 했으며, 왕의 소유물인 궁녀는 밀애를 나눴다는 이유로 참형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에서는 조선시대에 남자들이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한 모습을 보여준다.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교수인 저자는 조선시대의 각종 서신과 일기 등 기록을 통해 외조하는 남자들을 그린다. 정치적 가부장제가 모든 가정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살림꾼으로는 퇴계 이황(1501∼1570)이 있다. 퇴계는 음식과 의복 같은 안살림부터 농사와 노비 관리까지 집안 살림을 모두 주관했다. 심지어 자신이 한양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대신 살림을 관리하도록 했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부인을 잃고 홀로 자식 뒷바라지를 했다. 그는 직접 반찬거리를 만들어서 두 아들에게 보냈고, 편지로 반찬이 맛있는지를 묻는다. 살림과 거리가 멀 것이라고 생각되던 그 시대 남성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와 외조하는 남자들이라는 당대 남녀 관계의 이모저모는 흥미로운 미시사에 빠져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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