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손효림]깊은 치유의 힘 지닌 진심 담은 사과 한마디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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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림 문화부 차장
손효림 문화부 차장
“김영수, 23페이지 첫째 단락을 읽어보세요.”

고 장영희 서강대 교수(1952∼2009)가 생전 미국 소설 수업 때 학생에게 ‘주홍글씨’의 한 단락을 읽도록 했다. 아무 반응이 없어 다시 말하자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 서훈이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학생들 이름과 얼굴을 모두 아는 장 교수는 부아가 치밀어 쏘아붙였다.

“결석한 친구 대신 대리 대답하는 학생들이 있다더니 그렇게 하는 것이 아예 버릇이 돼서 이젠 친구 이름을 자기 이름인 줄로 착각할 정도인가?”

퇴근 무렵 한 학생이 찾아와 설명했다. 영수는 심각한 말더듬이 증세가 있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읽어야 할 때면 증세가 더 악화된다고. 당황한 영수를 도와주려고 서훈이가 대신 읽었다는 것. 장 교수는 어떻게 사과할지 고민하다가 시간이 지나 잊었다.

어느 날, 그는 다리가 불편한 자신을 데리러 온 아버지(고 장왕록 서울대 명예교수·1924∼1994)가 건물 현관 앞에 주차했다가 경비원에게 지적받고 연신 사과하는 모습에 “채신없어 보인다”고 투덜댄다. 돌아온 아버지의 말. “채신? 원, 잘못한 거 사과하는데 채신은 무슨 채신이냐?” 장 교수는 순간 영수의 얼굴을 떠올렸고, 다음 날 정식으로 사과하기로 다짐한다.

최근 재출간된 장 교수의 에세이 ‘내 생애 단 한 번’(샘터)에 나온 이야기다. 살다 보면 사과할 일이 생긴다. 잘못한 일에 대해 곧바로, 그게 어려우면 시간이 지난 후 사과를 꼭 했는가. 기자를 포함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반대로 사과를 받지 못하면 분한 감정이 오래 지속된다. 잊었다가도 문득 그 일이 떠올라 불끈불끈 화가 치솟는다.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 여성 4대의 삶을 그린 최은영 작가의 장편 소설 ‘밝은 밤’(문학동네)에는 인생의 고비마다 상처받은 이들이 나온다. 주인공 지연은 말한다.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거라고. 그저 잘못을 인정하길 바라는 사람,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애처롭게 바라는 사람, 사과할 사람이라면 애초에 상처를 주지 않았을 거라 체념하는 사람, 다시는 예전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그 나라에 살고 있을 거라고.

진심 어린 사과는 마음속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아물게 한다. 이는 사람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다. 주변의 여러 상황,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구구절절 따질 필요가 없다. 사안이 복잡할수록 핵심에 집중하면 된다. 잘못을 했느냐, 그렇지 않으냐.

잘못했으면 사과해야지 나이, 직위 등 그 외 다른 걸 왜 따지느냐는 고 장왕록 교수의 말에는 깊은 지혜가 담겼다. 사과하는 이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을 정확히 짚는다. 이런 마음과 태도를 가진 이가 늘어날수록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이가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나아질 세상을 그려본다.

#고 장영희 서강대 교수#채신#사과#마음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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