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처형된 무역일꾼, 억류된 중국 사업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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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9일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김정은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국가와 인민의 안전에 커다란 위기를 조성하는 중대 사건이 발생했다”며 고위간부들을 질타하고 있다. 조선중앙방송 캡처
6월 29일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김정은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국가와 인민의 안전에 커다란 위기를 조성하는 중대 사건이 발생했다”며 고위간부들을 질타하고 있다. 조선중앙방송 캡처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2월 중국 주재 북한대사가 교체됐다. 그런데 전임 지재룡 대사는 북한이 코로나 방역을 핑계로 받아주지 않아 아직 베이징에 머무르고 있다. 1942년생인 지 전 대사로서는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평양에서 자녀와 손자들과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베이징에서 기약 없는 나날을 보내게 됐다.

3월에 철수한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관 관계자 수십 명도 베이징에서 발이 묶였다. 북한이 체류비도 주지 않아 말레이시아에서 번 달러가 생활비로 다 날아가지만 불평할 수도 없다. 노동당 국제부 부부장을 지냈던 지재룡도 귀국하지 못하는데 그들의 하소연을 들어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이런 처지의 북한 사람들이 꽤 많다. 그만큼 북한은 해외와의 인적 왕래를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

이러한 폐쇄가 비단 북한 외교관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리진쥔(李進軍) 북한 주재 중국대사도 임기가 끝나 돌아가야 하지만, 북한이 신임 대사 입국을 거부해 평양에 사실상 발이 묶였다. 북한 주재 중국대사들의 임기는 보통 5년이다. 리 대사는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 부부장을 거쳐 2015년 3월에 부임했고 2020년 3월에 임기가 끝나야 했다.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중국이 특별비행기로 순안공항에 새 대사 한 명만 내려놓고 돌아오겠다고 했는데도 북한이 거절했다고 한다. 리 대사는 임기가 끝난 지 1년 반이 넘도록 인질처럼 평양에 잡혀 있다. 물자가 부족한 평양에서 사는 것도 어려운데, 그동안 승진도 할 수 없으니 리 대사의 속도 타들어갈 것 같다. 러시아 등 10여 개 평양 주재 외국 공관 외교관들은 탈출에 성공했지만, 중국은 북한처럼 중요한 우방국 대사 자리를 비워둘 순 없다.

이렇게 북한이 대사급 교류조차 막고 있는 와중인 6월에 간이 크게 중국 사업가를 북한에 데려간 북한 무역일꾼이 나타났다. 그가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 해도 신의주 세관에서 통과시켜 줄 정도면 평양에서 특별 지시가 떨어져야 가능하다.

요즘 김정은은 평양종합병원, 평양시 5만 가구, 의주비행장 대규모 방역시설 등 각종 건설 과제를 제시하고 간부들을 닦달하고 있다. 그런데 철강재나 시멘트, 방역설비 등을 중국에서 수입하지 못하면 건설이 진척될 수가 없다. 못하면 못했다고 처벌하고, 그렇다고 자재 수입도 못하게 하니 북한 고위 간부들은 죽을 맛이다.

진퇴양난 상황에서 그들은 못해서 목 잘리는 것보다는 편법을 써서라도 해놓는 것이 낫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못하면 눈에 딱 보여 처벌될 가능성이 100%인데, 몰래 물자를 중국에서 들여와 마무리하면 살 확률이 좀 더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위 간부 누군가가 측근 무역일꾼에게 “죽게 생겼다. 내가 국경을 열어줄 테니 중국에 가서 투자자나 물자를 좀 끌어오라”고 지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이 무역일꾼이 움직였다. 중국 사업가를 현장에 데려가서 “이런 것들을 해결해주면 이런 이권을 보장해주겠다”고 제안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게 발각됐다. 김정은의 지시로 무역일꾼은 즉시 체포돼 처형됐고, 중국 사업가는 북한에 체포돼 현재까지 억류 중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사업가도 북한과 나름대로 오랫동안 교류했던 사람이라고 하는데 도와주러 갔다가 봉변을 당하게 됐다. 앞으로 다른 중국 사업가들에게 북한과의 거래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될 듯하다.

처형된 무역일꾼의 윗선은 누구였을까. 6월 29일 김정은은 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해 “국가와 인민의 안전에 커다란 위기를 조성하는 중대 사건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엄중한 후과가 초래됐다”고 하면서 고위 간부들을 줄줄이 처벌했다. 리병철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은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해임됐고, 최상건 교육 및 보건담당 비서는 회의 중에 끌려 나가 아직까지 생사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박정천 군 총참모장은 원수에서 차수로, 김정관 국방상은 차수에서 대장으로 강등됐다. 고위급이 처벌되면 부하 간부들도 줄줄이 함께 처벌된다. 이때 처벌된 간부 중 한 명이 처형된 무역일꾼의 윗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 고위 간부들을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저들의 처지도 참 답답해 보인다. 이러면 이랬다고 처벌하고, 저러면 저랬다고 처벌하고, 그렇다고 달아날 수도 없으니 온전히 목숨을 보전할 경우의 수가 거의 없다. 김정은의 지시를 받는 순간 머릿속에는 “아이쿠, 죽었구나”하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을 것 같다. 서울에서 북한 간부들 욕하기도 미안하다.

#무역일꾼#중국 사업가#북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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