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극장의 추억[이재국의 우당탕탕]<57>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20일 03시 00분


코멘트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서울극장이 42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는 소식에 잠시 생각이 멈춰 섰다. 학창시절 개봉영화를 보기 위해 토요일 아침부터 줄서서 티켓을 샀던 기억이 제일 먼저 났다. 나름대로 문학청년이고, 할리우드 키드였기에 누구보다 빨리 개봉영화를 보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아는 척하는 게 자부심이었던 시절이다. 그렇게 조조영화 보는 걸 좋아했는데 대학에서 비슷한 취미를 갖고 있는 과 후배를 알게 됐다. 당시 우리는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답게 주류보다는 비주류 문화에 심취했고, 수업이 끝나면 문화원을 돌아다니며 예술영화를 찾아보며 데이트를 했다. 독일문화원과 프랑스문화원을 찾아다니며 자막도 없는 5시간짜리 영화를 보고 선술집에서 토론하다가 어느 날은 싸우기도, 어느 날은 뽀뽀하기도 하는 찬란했던 나날을 보냈다.

“선배, 이거 봐봐요.” 나는 후배가 내민 신문기사를 봤고, 거기에는 일본 영화 ‘러브레터’ 개봉 포스터가 전면광고로 실려 있었다. “이거 보자고? 우리 봤잖아.” “그게 아니라 개봉 이벤트 보시라고요.” 제일 먼저 온 관객에게 캠코더를 주고 두 번째 관객에게 이와이 슌지 감독의 친필 사인 포스터, 세 번째 관객에게는 CD플레이어, 그리고 선착순 100명에게는 영화 포스터를 준다는 내용이었다. 이거다 싶어 ‘러브레터’가 개봉하는 날 서울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11월이라 쌀쌀했고, 나는 든든하게 차려입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집을 나섰다. 먼저 도착한 후배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었다. 오전 6시 30분에 극장에 도착했는데 이미 50명 넘는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헐, 이게 이럴 일이야?” 하긴, 줄 한번 잘 서면 캠코더가 한 대 생기는데 그럴 만했다. 오기가 생겼다. “다음 주에 다시 도전하죠!” “몇 시에 오자고?” “전날 밤에요.” 경쟁자가 많아질까 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일주일을 기다렸다.

금요일 집을 나서며 따뜻한 옷과 담요까지 챙겨 나왔고 저녁을 먹고 오후 9시부터 줄을 설 계획으로 오후 7시에 종로3가역으로 갔다. 우린 또 한 번 망연자실했다. 이미 바닥에 박스를 깔고 이불까지 덮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10명이 넘었다. 제일 앞에 있는 분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죄송한데 제일 먼저 오신 분이세요?” “아니요. 저는 4등인데요.” “네? 그럼 1등은 어디계세요?” “저도 못 봤어요. 1등이 2등 얼굴 기억해주고, 2등이 3등 얼굴 기억해주고 저는 3등 얼굴밖에 몰라요.” “그럼 혹시 언제부터 줄 서신 거예요?” “저는 3일 됐고요. 1등 하신 분은 일주일 넘었다고 들었어요.” 아, 이건 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수준이 아니라 먼저 태어난 놈을 만난 기분이었다.

개봉 이벤트에서 선물 받는 건 포기했지만 여전히 개봉하는 날 조조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다 얻어 걸린 행운이라면 2000년 7월 15일. 류승완 감독이 연출한 류승범의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개봉 첫날 조조영화를 보러갔다가 류승범을 만나 사인을 받았던 일이다. 영원한 건 없지만 내 젊은 날 한 페이지를 함께했던 서울극장이 사라졌다는 건 오랜 친구를 떠나보낸 것처럼 마음이 허한 건 사실이다. 고마웠다, 서울극장.

#서울극장#폐관#추억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