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아프간 외교 반면교사… 김선일 참수 사건 |
탈레반이 이끌게 된 아프가니스탄과 복교할 때 참고해야 할 것이 김선일 씨 참수 사건을 겪은 후 이라크와 다시 외교관계를 맺게 된 과정이다. 2003년 3월 20일 ‘이라크 자유’ 작전을 감행한 미군은 개전 두 달도 안 된 5월 1일 이라크군을 전멸시키고 이라크 전역을 석권했다.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전투 종료’를 선언했다. 그러자 알카에다와 궤를 같이하는 무슬림 세력이 이라크 주민들과 섞인 상태로 게릴라 투쟁에 나섰다. 미군은 이들을 제압하는 데 애를 먹었다. 동맹국에 참전을 요청했는데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호응했다. 2003년 4월 2일 국회가 이라크전쟁 파견 동의안을 통과시키자 노무현 정권은 바로 의료지원단 ‘제마’와 건설지원단 ‘서희부대’를 파병했다. 그리고 2004년 2월 23일 특전사 여단을 모태로 한 8000명 규모의 전투부대 ‘자이툰 사단’을 창설해 추가 파병에 들어갔다. 그때 김선일 씨 참수 사건이 일어났다. 2004년 6월 21일 새벽 5시 10분쯤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의 2인자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가 이끄는 것으로 보이는 세력에게 납치된 한국인 김선일(1971년생, 당시 33) 씨가 이라크 팔루자에서 무장 3인조에 둘러싸인 채 영어로 “살고 싶다. 이곳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 한국은 이라크에 파병하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모습과 납치세력이 “철군 요구를 한국이 24시간 안에 들어주지 않으면 김씨를 참수할 것”이라고 협박하는 장면을 2분간 방송했다. 당시 우리는 여행금지국가 제도가 없었다. 가나무역은 팔루자에 진출해 인근에 주둔한 미군 부대에 식자재를 납품했는데, 한국이 이라크 추가 파병을 결정하자 저항세력은 직원인 김씨를 표적으로 삼아 납치했다. 한국과 이라크 외교관계는 한국-아프간 외교관계 이상으로 국제정치에 따라 출렁거렸다. 1963년 우리는 이라크와 외교관계를 맺었으나, 이라크에 총영사관을 설치한 것은 사담 후세인 정권이 출범(1979)한 다음인 1981년이다. 대사관을 설치한 것은 이란-이라크전쟁이 끝난(1988) 이듬해인 1989년이다. 이 시기 우리는 이라크에 근로자를 보내 적잖은 오일머니를 벌어들였다. 가나무역 관계자 역시 이 경험이 있었기에 ‘이라크 자유 작전’ 때 이라크에 들어가 미군 부대에 식자재를 보급하는 사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90년 8월 후세인 정권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고, 이에 맞서 이듬해 초 미국이 1차 걸프전을 펼치자 우리는 이라크 공관을 폐쇄했다. 그리고 ‘이라크 자유 작전’으로 미군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고 신이라크 정부를 세운 다음인 2003년 5월 17일 대사관을 다시 열었다. 이때 우리는 신이라크 정부측에 김씨 참수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신이라크 정부가 알타우히드 왈지하드와 무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라크가 안정화되자 한화를 비롯한 여러 기업이 진출해 전후 특수를 누렸다. 미국은 2011년 이라크에서 완전 철수했다. 당시 이라크는 아프간과 같은 급변을 겪지 않았다.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같은 저항세력이 생겨났지만 신이라크 정부를 뒤집진 못했다. 그러나 미군이 철수한 아프간에서는 가니에서 탈레반으로 급격한 ‘정권교체(regime change)’가 일어났다. 이 교체는 미국이 미국에 맞서온 탈레반을 아프간 새 주인으로 삼아 중국을 흔들려는 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이라크 정부를 상대로 한 복교와 탈레반 정권을 대상으로 한 복교는 이렇게 같고 다른 점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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