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주 출신의 참전용사 대니얼 스톡스 씨(49)는 지금 성조기를 들고 미 동부 보스턴에서 뉴욕까지 약 400km에 이르는 길을 걷고 있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2001년 9·11테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일들을 해온 그는 올해는 20주년을 맞아 좀 더 특별한 것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보스턴 국제공항에서 9·11테러 피해 현장인 뉴욕 맨해튼 그라운드제로까지 걸어서 순례하는 것. 20년 전 보스턴에서 납치된 여객기가 뉴욕 세계무역센터(WTC)에 충돌한 것에서 경로를 착안했다.
2주에 걸친 그의 여정에는 동행자가 있다. 20년 전 그날, 그라운드제로에서 31세 소방관 남편을 잃은 중년 여성 데니스 올슨 씨다. 남편 사진을 배낭에 매달고 이 길을 걷는 올슨 씨는 지역 언론에 “가끔은 그 사건이 전생(前生)이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바로 어제 일 같기도 하다”며 “남편은 유머감각도 있고 책임감도 강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17세 고교생 에즈라 릭터도 이 여정에 합류했다. 두 사람이 중간에 묵었던 에어비앤비의 가족이었던 릭터는 “내가 태어나기 전 벌어진 비극을 개인적으로 기억하고 싶었다”며 동참 이유를 밝혔다. 지난달 29일 시작된 이들의 여정은 20년 전 첫 번째 비행기가 WTC를 강타한 이달 11일 오전 8시 46분에 끝난다. 각지에서 답지하는 성금은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자살폭탄 테러에 희생된 미군 13명의 가족들을 위해 쓸 예정이다.
서부에서는 사이클링 부대가 국토를 횡단해 그라운드제로로 향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 출신 소방관 10명은 지난달 1일 서부 해안에 인접한 샌타클래라에서 출발해 뉴욕까지 오는 40일간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이미 여행 막바지에 접어든 이들은 그동안 하루 약 100마일(약 160km)씩 달리면서 폭염과 폭우, 토네이도 등 온갖 고비를 맞았다. 그때마다 든 생각은 “20년 전 뉴욕 소방관들이 겪었을 아픔에 비하면 이런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이었다. 소방관 존 번 씨는 “우리는 경찰, 소방관, 군인들의 희생을 절대 잊지 않겠다”면서 “만약 지금 출동 경보가 울린다면 우리 소방관들도 (뉴욕 소방관들과) 같은 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쪽인 수도 워싱턴에서도 역시 그라운드제로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이가 있다. 20년 전 소방관으로서 테러 현장에 출동했다가 목숨을 잃은 남동생 스티븐 실러(당시 34세)를 기리기 위해 형 프랭크 실러 씨는 800km에 이르는 길을 걸어서 다니고 있다. ‘잊지 말자’라는 제목이 붙은 그의 여정은 가는 곳마다 취지를 공감하는 동네 주민의 응원이 끊이지 않는다. 20년 전 비행기 승무원으로서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봤던 폴 베네토 씨(62)도 기내 음료카트를 밀면서 보스턴 공항에서 그라운드제로까지 이동 중이다. 그는 “다니면서 비가 오거나 다리가 아프거나 할 때는 카트에 놓인 동료들의 사진을 보면서 ‘지금 내가 하는 것은 이들이 그날 테러에 맞섰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고 했다.
지난해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때문에 9·11 공식 행사도 우울하고 위축된 분위기에서 진행됐지만 올해는 백신 접종이 확대되면서 대부분 정상적으로 열릴 계획이다. 11일 그라운드제로에서 진행되는 추모식에서도 올해는 유족들이 직접 돌아가면서 희생된 가족 2983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이날 그라운드제로와 워싱턴 인근 국방부, 펜실베이니아주 섕크스빌 등 9·11테러 관련 장소 3곳을 모두 방문한다. 이 자리에는 부인 질 바이든 여사도 함께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