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출토 유기물 연대 측정
4세기 중엽 시작 5세기 초 완공…삼국 중 가장 늦게 고대국가 형성
2017년 이어 여성 인골 또 발굴…서쪽 성벽서 최소 27명 희생된 듯
신라 천년 왕성(王城)인 경주 월성(月城)이 4세기 중엽 처음 지어져 5세기 초 완공된 사실이 발굴 조사 결과 처음 확인됐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 101년(파사왕 22년)보다 약 250년 늦은 것으로, 신라의 고대국가 발전에 대한 역사해석에 파장이 예상된다. 월성 축조 단계에서 20여 명의 신라인이 ‘사람 제물’로 바쳐졌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흔적도 발견됐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성 서쪽 성벽에서 출토된 유기물 40여 점에 대한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 성벽 기초부가 4세기 중엽부터 조성됐으며, 보축을 거친 성벽이 5세기 초 완공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7일 밝혔다. 발굴단에 따르면 신라인들은 일종의 뼈대 역할을 한 기초부와 중심 토루(土壘·흙무더기)를 돌과 흙으로 쌓은 뒤 그 양옆으로 흙과 볏짚, 모래 등으로 구성된 성벽을 4차례에 걸쳐 덧대어 쌓았다.
지금까지 역사학계 일각에선 월성이 처음 지어진 시기를 3세기 말 혹은 5세기 후반으로 보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이번 결과는 이 같은 연대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학계는 4세기 중엽 월성이 처음 지어진 사실은 이 시기에 신라가 성읍국가에서 고대국가로 도약했음을 보여주는 핵심 근거라고 보고 있다. 거대한 성벽을 축조하려면 막대한 노동력이 동원돼야 하는데 이는 강력한 왕권이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이다.
신라는 3세기 이전까지는 사로국(斯盧國)으로 불리며 경상도 일대 소국들을 병합하는 성읍국가 단계를 거쳤다. 그러다 영토를 넓힌 4세기 마립간(신라왕의 옛 이름) 시대가 열리면서 왕이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고대국가 체제가 형성된다. 이 시기는 대릉원 등 경주에 거대한 봉분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들이 잇따라 조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현장을 둘러본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월성이 초축된 4세기 중엽 신라에 결정적인 정치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발굴로 신라의 고대국가 성립이 삼국 중 가장 늦었음이 확실해졌다. 백제의 경우 왕성인 서울 풍납토성을 3세기 후엽부터 쌓기 시작한 사실이 과거 발굴조사로 확인된 바 있다. 신라에 비해 약 반세기 앞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월성 초축 시기를 놓고 삼국사기와 발굴 조사 결과가 서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무얼까. 학계 일각에선 신라가 삼국통일 후 사서 편찬 과정에서 삼국 중 가장 미약했던 과거를 감추기 위해 사실을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쪽에선 파사왕대 별도의 소규모 토루를 지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김재홍 국민대 교수는 “월성이 지어지기 전 이곳에 살던 호공의 집을 탈해가 빼앗은 내용이 삼국사기에 나온다”며 “파사왕 당시 월성에 자연구릉을 이용한 토루를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월성 서쪽 성벽 토루 옆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희(人身供犧)에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20대 여성 인골 1구가 발견된 것도 주목된다. 앞서 2017년에도 이 인골과 50cm가량 떨어진 곳에서 사람 제물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50대 남녀 인골 2구가 발견됐다. 이를 인신공희로 보는 근거는 이들 인골이 토루 경계에 놓여 성벽 축조 방향과 일치하는 데다 인골 옆에서 동물 뼈, 토기 등 제의의 흔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발굴단은 성벽 축조 과정에서 액운을 막고 무사히 건립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사람 제물을 바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1985, 1990년에 이뤄진 월성 발굴 때 발견된 인골 20여 구도 인신공희와 관련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조사됐다. 만약 이들도 사람 제물이 맞다면 월성 서쪽 성벽을 세우면서 최소 27명이 희생됐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김재홍 교수는 “인신공희 인골들은 고대국가로 도약한 신라의 정치권력이 사람을 지배하게 됐음을 과시하는 측면도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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