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치러진 미국 버지니아주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의 글렌 영킨 후보(55)가 민주당의 테리 매콜리프 후보(64)를 누르고 승리했다. 민주당 텃밭인 버지니아주에서 공화당 주지사가 나온 것은 2009년 이후 12년 만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리전 격으로 평가돼 많은 관심이 쏠렸던 이번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가 승리하면서 바이든 행정부는 국정 운영 동력에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됐다. 내년 11월 중간선거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영킨의 깜짝 승리는 민주당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엄중한 경고”라며 “내년 중간선거와 트럼프의 정계 복귀에 대한 (민주당의) 공포에 기름을 부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CNN방송에 따르면 영킨 후보는 개표가 99% 진행된 상황에서 50.7%의 득표율로 매콜리프 후보(48.5%)를 누르고 당선됐다. 영킨 후보는 개표 초반부터 6∼7%포인트 차로 여유 있게 매콜리프 후보를 따돌렸고, 개표 과정에서 한 번도 역전을 허용하지 않으며 승기를 유지했다. 당초 초박빙의 접전이 예상됐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영킨 후보에 대한 지지가 예상보다 강했다. 공화당은 개표가 시작된 지 2시간 반 만에 일찌감치 트위터에 영킨 후보의 당선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올렸다.
영킨 후보는 세계 3대 사모투자펀드 운용사인 칼라일그룹 최고경영자(CEO) 출신의 금융인으로 4억 달러 규모의 자산을 보유한 억만장자다. 그러나 정치 분야 경험은 없어 민주당의 거물 정치인 매콜리프 후보를 상대하기가 버거웠던 상황이다. 매콜리프 후보는 민주당전국위원회(DNC) 회장을 지내고 1996년 빌 클린턴, 2008년 힐러리 클린턴의 대선캠프 위원장을 맡았던 거물 정치인이다. 2014∼2018년 버지니아주 주지사로 재직하며 유권자들에게 친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에 맞선 영킨은 자신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타격을 받은 지역 경제를 되살릴 전문가라는 점을 앞세워 왔다. 소득세 감면, 식료품 판매세 폐지 등을 통해 총 18억 달러에 이르는 대대적 세금 감면 공약도 내걸었다. 특히 교육정책에서 민주당이 밀어붙여 온 비판적 인종 이론에 반대하고, 최근 라우든 카운티의 한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을 ‘민주당 교육정책의 실패’로 규정하며 학부모와 중년 여성들의 표심을 끌어당겼다.
매콜리프 후보는 영킨 후보를 ‘트럼프의 아바타’, ‘트럼프의 시종’이라고 선거기간 내내 공격하며 극우 이미지를 씌우려는 시도 외에 주목할 만한 메시지나 공약을 내놓지 못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 중이던 3조5000억 달러 규모의 매머드급 사회복지 예산안이 민주당 내부 분열로 의회 처리에 난항을 겪으면서 유권자들의 실망감도 커졌다. 8월 초만 해도 7%포인트 차까지 앞서 나가던 매콜리프 후보의 지지율은 영킨 후보에게 급격히 따라잡히기 시작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등 유력 인사들이 지지유세에 출동했지만 결국 역전을 허용하고 말았다.
버지니아주는 1년 전 대선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트럼프 전 대통령을 10%포인트 차로 여유 있게 제치고 이겼던 곳이다. 이를 포함한 최근 4번의 대선에서 모두 민주당 후보가 이겼다. 유럽을 순방 중이던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영국 글래스고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선거 관련 질문을 받고 “우리는 이길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민주당의 안방이나 다름없던 이 지역에서 공화당에 주지사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은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그만큼 뼈아픈 일격이다. 취임 후 1년도 되지 않아 냉랭해진 민심을 확인한 셈이다.
워싱턴포스트가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의 중대한 패배”라고 지적하는 등 현지 언론들은 이번 선거 결과를 사실상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로 보고 있다. 코로나19 여파와 경제 문제는 물론 최근 아프가니스탄 철군에서 빚어진 혼란, 연말을 앞둔 물류대란 등이 겹치면서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은 취임 이후 최저 수준인 43% 안팎까지 떨어져 있다.
이번 선거 결과는 곧바로 내년 중간선거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현재 상원은 민주당 대 공화당이 50 대 50, 하원은 220석 대 212석으로 8석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공화당이 기세를 몰아 내년 중간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여소야대로 바뀌면서 바이든 행정부의 국정 운영 동력이 급격히 꺾일 수밖에 없다.
민주당과 백악관은 충격파를 최소화하는 데 부심했다. 백악관의 한 참모는 “한 번의 선거를 놓고 아직 1년이 남은 다음 선거까지 미칠 영향을 따지는 건 지나치다”며 의미를 축소했다. 바이든 대통령도 글래스고 기자회견에서 ‘선거 결과가 대통령직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내가 못해서 그렇다거나, 나의 (국정) 어젠다가 승패에 영향을 줬다고 볼 근거가 없다”며 책임론을 차단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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