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 전선 가설 작업을 하다 2만2000V 고압선에 감전이 됐다. 깨어보니 양팔이 없었다. 당시 의사는 “생명을 건진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했다. 사실상 자포자기 상태로 지내다보니 체중이 늘기만 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마라톤이었다. 직장 상사의 권유로 2003년 2월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사고 나던 해 3월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겸 동아마라톤에서 하프코스를 달린 뒤 “마라톤은 사람이 할 운동이 아니다”라며 그만뒀던 그였다. 하지만 다시 달려보니 세상이 열렸다. 이젠 마라톤 풀코스를 넘어, 태권도와 철인3종까지 섭렵하며 새로운 꿈을 키우고 있다.
마라톤 42.195km 풀코스를 70회 넘게 완주했고, 개인 최고기록이 2시간 55분 18초인 김황태 씨(44)는 운동을 통해 꾸준히 인생을 개척하고 있다. 양팔이 없는 1급 장애를 훌쩍 뛰어 넘어 태권도와 철인3종(트라이애슬론)으로 장애인올림픽(페럴림픽) 메달 획득을 목표로 연일 땀을 흘리고 있다.
김 씨는 5일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열린 세계 트라이애슬론선수권대회 시리즈 장애인 스프린트코스(수영 750m, 사이클 20km, 마라톤 5km)에 출전해 1시간 17분 10초를 기록해 PTS3(중대한 근육 손상 및 절단) 남자 부문에서 5위에 올랐다. 그는 수영 20분 27초로 상위 5위중 가장 기록이 늦었다. 사이클(32분 59초), 마라톤(20분 43초)에선 크게 밀리지 않았지만 양 팔이 없어 수영에서 기록 차가 컸다. 수영은 팔 젓기가 속도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모든 것을 발로만 해야 해 수영이 가장 힘들어요. 숨쉬기가 어려워요. 숨을 쉴 때는 발을 더 힘차게 차면서 머리를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물에 떠서 간다는 게 중요하죠. 실내수영장에선 17분대인데 오픈워터는 파도가 있어서 더 힘드네요.”
사이클은 의수를 차고 운전을 한다. PTS3부문은 의수 의족 등 보조 기구를 제작해 달아도 되기 때문이다. 의수가 없다면 사이클엔 아예 나가지도 못한다.
“전기 사고 나기 전에 자전거도 타고 오토바이도 탔는데 의수를 하고 타려고 하다보니 무서웠습니다. 처음엔 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했어요. 엄청 넘어졌어요. 이젠 적응해 잘 탑니다.”
김 씨는 당초 장애인스포츠 쪽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장애의 아픔을 딛고 건강을 되찾기 위해 마라톤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양 팔이 없는 상태에서도 마스터스마라토너들의 꿈의 기록인 풀코스 서브스리(3시간 이내 기록)를 기록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자 장애인스포츠 쪽에서 ‘러브콜’이 이어졌다.
먼저 국내에서 열린 2018평창겨울올림픽 이후 열린 평창겨울패럴림픽에 출전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2015년이었다. 노르딕스키로 출전하려고 했는데 2016년 말 왼쪽 무릎 후방 십자인대가 파열 돼 수술을 받는 바람에 출전이 무산됐다.
“재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여름 페럴림픽 태권도에서 제 장애 분야가 추가된다고 출전 의향을 물어왔습니다. 당연히 간다고 했죠.”
2018년 아시아장애인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K41부문 61kg이하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2019년 세계장애인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했지만 정작 1년 연기돼 치른 2020도쿄 페럴림픽엔 출전하지 못했다. 김 씨 장애분야 종목이 추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씨는 2019년 3월 장애인 철인3종 스프린트 종목이 도쿄 페럴림픽에 추가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철인3종 훈련도 시작했다. 그 때부터 수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그냥 동네에서 심심풀이로 하던 수영이었는데 집 근처에 인천장애인국민체력센터가 개장 됐고, 그해 6월 아시아장애인철인3종대회가 있다고 해서 본격적으로 훈련했다”고 했다. 사이클도 개조해서 사고 이후 처음 타기 시작했다. 이번 아부다비 대회까지 8차례 장애인 철인3종 스프린트 대회에 출전했다. 이번 대회 기록이 개인 최고기록이다.
“철인3종도 결국 제 장애 분야 종목이 추가되지 않아서 올림픽 출전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2024년 파리 페럴림픽 땐 정식 종목이 될 것으로 믿고 열심히 훈련하고 있습니다.”
현재 김 씨는 장애인 태권도 및 철인3종 국가대표로 활약하고 있다. 이제 스포츠는 그의 삶, 그 자체가 됐다.
“솔직히 처음 달릴 때도 팔이 없어 균형을 잡지 못해 힘들었어요. 새로운 스포츠를 시작할 땐 팔이 없어 더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하면 되더라고요. 이를 악물고 훈련했습니다. 이제 제 삶에서 마라톤과 수영, 사이클, 태권도가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스포츠를 통해서 팔 없는 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제 가족에게도 자랑스러운 가장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김 씨는 아내 김진희 씨(44)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옷 입는 것부터 식사하는 것까지 도움을 받아야 한다. 아내는 고교시절 만났고 장애를 입은 상태에서도 집안의 반대를 무릎 쓰고 결혼해 김 씨의 도전을 옆에서 돕고 있다. 아내 김 씨는 “장애에도 굴하지 않고 마라톤은 물론 다양한 스포츠를 통해 새로운 도전을 하는 남편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김 씨는 “장애인은 물론 비장애인도 밖으로 나와 스포츠 즐기기”를 권했다.
“저도 운동을 안했을 땐 무기력하게 자포자기한 상태로 보냈습니다. 이젠 운동은 제 삶의 활력소이자 제 삶의 가장 중요한 일부가 됐습니다. 꿈도 꾸게 됐습니다. 장애는 장애일 뿐입니다.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는 “남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저도 처음 달릴 때 남들이 저를 어떻게 볼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달리니 많은 사람들이 응원해줬습니다. 그것에 더 용기를 내게 됐죠. 남의 시선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장애인 여러분들이 용기를 내길 바랍니다. 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스포츠가 많습니다. 전 운동을 하면서 살아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씨는 오전엔 집에서 고정식 자전거를 탄다. 점심 때 수영장에서 수영을 한다. 저녁 때 마라톤클럽에 가서 동호인들과 함께 달린다. 철인3종 대회가 있을 땐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집중훈련을 한다. 태권도 대회가 있으면 태권도에 집중한다. 김 씨는 다음달 터키에서 열리는 장애인태권도선수권대회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올림픽 출전 꿈을 꾸며 이렇게 운동에 빠져 살며보니 매일이 즐겁고 행복하다”며 웃었다.
김 씨는 “11월 28일 서울 잠실YMCA에서 장애인 실내철인3종경기(파라 트라이애슬론)가 열린다. 참가할 수 있는 장애인들은 참가하고, 관심 있는 분들은 응원을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애인 실내철인3종경기는 수영은 수영장에서 하고, 사이클과 달리기는 고정식사이클과 러닝머신에서 달린다. 거리는 장애인철인3종경기 스프린트코스(수영 750m, 사이클 20km, 마라톤 5km)와 같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