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 출신의 30대 남성.’ 스타트업의 주류 창업자를 상징하는 열쇳말이다. 하지만 갈수록 창업자들의 출신 대학이 다양해지고, 여성이나 40대 이상 창업자 비율도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인 스타트업 생태계의 숲이 다채롭고 풍성해진 것이다. 국민대 혁신기업연구센터와 함께 스타트업 창업자 1462명을 전수 분석해 창업자 지도를 그려봤다.》
스타트업 창업자 1462명 전수조사
올해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 원 이상) 반열에 새로 오른 부동산 플랫폼 직방의 창업자 안성우 대표(42)는 2011년 32세 때 창업에 뛰어들었다. 서울대 통계학과 출신으로 게임개발자, 공인회계사, 벤처투자 심사역 등을 거쳐 직방을 창업한 그는 10년 만에 회사를 프롭테크(부동산+기술) 분야를 선도하는 대표 스타트업으로 키워냈다.
명문대 출신의 전문 경험을 쌓은 30대 남성.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주류 스타트업 창업자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이렇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40대 이상, 여성, 비(非)명문대 출신 창업자 비율이 높아지는 등 스타트업 창업 생태계의 다양성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6일 동아일보와 국민대 혁신기업연구센터가 2017년 이후 외부 투자 유치에 성공해 시장의 1차 검증을 통과한 스타트업 창업자 1462명을 전수 조사해 분석한 결과다. 중소벤처기업부와 법인등기부등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공개된 정보를 기초로 수집한 뒤 창업 시기별로 비교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스타트업 창업자의 출신 대학이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2011∼2015년 회사를 세운 창업자의 경우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KAIST 포스텍 등 국내 주요 5개 대학 출신의 비중이 47.4%로 절반에 가까웠다. 하지만 2016년부터 올해 5월까지 설립한 회사의 창업자에선 36.7%로 비중이 낮아졌고, 대신 그 외 국내 대학(49.7%)과 해외 대학(13.6%) 출신의 비중이 높아졌다.
인천대 출신으로 해양오염 처리 로봇 개발사 ‘쉐코’를 창업한 권기성 대표는 “이제는 소위 명문대 출신이 아니더라도 조금만 발품을 팔면 기업, 정부의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투자 유치 등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환경이 됐다”고 말했다.
여성 창업자도 2011∼2015년(회사 설립 기준) 7.5%에서 최근 5년에는 12.1%로 증가했다. 아이 돌봄 중개 서비스 째깍악어의 김희정 대표, 온라인 언어 치료 플랫폼 언어발전소의 윤슬기 대표 등이 출산과 육아 등에 따른 경력 단절 시기를 거쳐 회사 설립 후 외부 투자 유치까지 성공한 대표적인 여성 창업자다. 윤 대표는 “다양한 성공 케이스를 지켜본 ‘경력 단절 여성’이 더욱 적극적으로 사업에 도전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40대 이상 ‘늦깎이 창업자’도 많아지는 추세다. 40대 이상 창업자 비율은 2016∼2021년 30.6%로 과거 5년(22.0%)보다 크게 높아졌다.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는 “미국에서도 잘 성장하는 스타트업 창업자를 보면 40대가 가장 많다”며 “이들은 창업 전에 쌓은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좀 더 확실한 결과물을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창업자의 출신과 구성이 다양해진 것에 대해 스타트업 업계에선 과거 인맥과 경력을 기반으로 한 폐쇄적인 투자 문화가 투명하게 바뀐 점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다.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등 대기업과 정부가 적극적으로 창업 지원에 나서면서 투자를 받을 기회가 많아졌고 정보도 다양해졌다. 예전이라면 투자 심사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높았던 창업자들이 이제는 적극적으로 사업에 도전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지난해 연간 벤처·스타트업 투자 실적은 역대 최대인 4조3045억 원으로 2016년보다 2배 이상 증가했다. 정부의 창업지원 예산도 2016년 3766억 원에서 지난해 8492억 원으로 급증했다. 네이버, 카카오 등 정보기술(IT) 기업도 자회사나 펀드 등을 통해 연간 수십 곳의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
조사를 총괄한 김주희 국민대 혁신기업연구센터 연구본부장은 “다양한 경력과 경험을 가진 창업자가 늘어나면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나 기술이 나타날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 출신 창업자 113명 최다… 네이버-SK 출신도 늘어
스타트업 창업자 출신 기업 보니
국내 스타트업 창업자의 창업 전 경력을 분석하니 삼성 출신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에는 네이버와 SK, 카카오 출신 스타트업 창업자도 늘어나며 삼성과 함께 스타트업 창업 생태계의 핵심 축을 이루는 등 변화의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16일 국민대 혁신기업연구센터는 직무 경력이 확인된 스타트업 창업자 1075명을 네트워크 구조 형태로 분석했다. 분석 프로그램 노드엑셀(nodeXL)을 활용해 창업자가 거친 직장을 선으로 연결해 어느 기업 출신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더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를 그래픽과 수치(중심성 지수)로 확인했다.
삼성전자를 포함한 삼성 출신 창업자는 총 113명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2011∼2015년 회사를 세운 창업자의 경우 삼성전자(중심성 지수 42) 등 삼성의 영향력이 네이버(22)와 SK(11), 현대자동차(9) 등 다른 기업보다 월등히 컸다.
삼성전자는 2012년부터 사내 스타트업 프로그램인 ‘C랩’을 통해 임직원들의 창업을 지원하고 있다. 삼성전자에서 2018년 독립한 헬스케어 스타트업 브레싱스의 이인표 대표는 “체계적으로 업무를 배우면서도 서로 다른 의견과 아이디어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조직문화 덕분에 창업의 길을 선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2016년 이후 창업자의 경우 네이버, 카카오 등 대형 정보기술(IT) 기업과 대기업 출신이 많아졌다. 삼성(68)의 뒤를 이어 네이버(32), SK(29), 카카오(20), LG(19) 등이 이름을 올렸다.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의 김용현 공동대표는 “네이버, 카카오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정보기술(IT) 기업에서 대규모 디지털 서비스를 기획, 운영, 관리해 본 경험이 창업을 결심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스타트업에서 근무한 경력을 살려 직접 창업에 나서는 사례도 늘고 있다.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에서 근무하다 공유주방 사업을 시작한 최정이 ‘단추로끓인수프’ 대표와 야놀자 출신으로 커피구독 서비스를 운영하는 스프링온워드 정새봄 대표 등이 대표적이다. 벤처투자 업계 관계자는 “스타트업이 또 다른 창업자를 낳는 문화가 이어지면 생태계가 더 확장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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