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부산경찰청 과학수사과 사무실. 김도정 현장지원팀장(54·경감)이 신발 포장박스 크기의 종이상자를 내밀었다. 상자 안에는 ‘속옷·이물질 수집’ ‘직장 내 증거 채취’ 등 문구가 적힌 12개의 소형 박스가 사용 설명서와 함께 나란히 담겨 있었다.
이 종이상자는 최근 행정안전부의 ‘2021년 중앙우수제안 경진대회’ 공무원 제안 부문에서 은상을 수상한 ‘성폭력 증거채취 응급키트 리뉴얼’이다. 성범죄 피해자의 상담·법률 지원을 하는 해바라기센터에서 범죄 증거 수집을 위해 사용 중인 기존 키트의 맹점을 개선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존 키트는 12개 검사품목이 한데 담긴 것뿐이었다. 성폭행처럼 피해가 심하면 12개 품목 모두 쓴다. 그러나 성희롱, 강제추행 등은 이물질 수집을 위한 3·4·7·10단계 도구만 쓰면 되지만, 검사를 위해 한 번 뜯으면 나머지 단계의 도구도 버려야 했다. 키트 한 개의 가격은 7만5000원이기에 예산 낭비도 심했다. 또 기존 키트는 품목별 도구가 종이봉투에 담겨 있다. 해바라기센터에서 경찰, 검찰로 이송되고 증거품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땀과 지문으로 증거가 오염될 수 있었다.
부산경찰청 과학수사과는 이에 대한 개선책을 고민했다. 키트 공급 업무가 경찰 소관이 아니지만 김 팀장 등 5명이 지난해 2월 스터디그룹을 꾸려 9개월간 연구하고 샘플을 만들었다. 리뉴얼 제품은 ‘라지’와 ‘스몰’로 구분했다. 라지는 12개 품목을 다 담고, 스몰은 4개만 포장했다. 또 증거품을 한눈에 쉽게 파악할 수 있게 각 품목을 소형박스로 별도 포장하고 그 위에 검사 항목을 글자로 표기했다. 기존 키트 상자 외부에 있던 ‘성폭력’ 문구도 지웠다. 피해자의 2차 정신적 가해를 우려해서다.
김 팀장은 “수사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스스로 개선하는 습관이 직원들에게 배어 있다”며 “과학수사 능력을 높여 지능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도록 더 많은 노력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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