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스타그램의 ‘6DP(6days.paper)’ 계정에는 가위로 오려낸 여러 신문 기사 사진이 가득하다. 사진 속 신문의 기사 문장이나 칼럼 구절에는 여러 색깔의 형광펜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고, 각종 이모티콘도 붙어있다. 인상 깊은 문장이나 글귀는 따로 적어놓기도 한다. 언뜻 봐선 정체를 알기 힘든 이 계정의 팔로어는 6일 기준 약 1만5600명. 지난해 5월 계정을 개설한 뒤 7개월여 만에 급성장했다. 가장 인기를 끈 게시물의 조회수는 약 10만 회다.
개인의 공부 내용을 기록하는 용도로 유행했던 ‘공스타그램’(공부+인스타그램)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계정은 ‘신스타그램’(신문+인스타그램)이다. 주 6일 발간되는 일간지 중 8개(동아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한국경제 한국일보)의 기사를 요약하고 스크랩한 것이 이 계정의 주요 게시물이다.
젊은층이 신문을 멀리한다는 통념과 달리 이 계정 팔로어의 80.3%가 18~34세다. 주로 ‘2030세대’인 것이다. 팔로어들은 24시간 동안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스토리’ 형태의 게시물이 올라오면 이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계정에 공유했다. 게시글에 “종이 신문이 이렇게 재밌는 줄 몰랐다”는 감상과 댓글을 남기며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2030세대가 오래된 것의 장점을 재발견하는 ‘역주행’을 즐기고 있다.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대신 LP판을 즐기고, 전자책 대신 종이책을 집어 든다. 스마트폰 카메라 대신 필름 카메라를 찾기도 한다. 익숙함이나 편리함 대신 직접 만지고 소유할 수 있는 ‘물성(物性)’을 중시하고, 옛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 지금은 찾기 어려운 감성을 발견하는 재미도 2030세대를 역주행 열풍으로 이끄는 요인이다.
● 밑줄 치며 신문 열독하는 ‘2030’
“다른 사람은 어떤 기사를 재밌게 읽었는지 알게 되는 재미가 있어요. 신문 지면을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포털 사이트 기사만 보다가 ‘6DP’에 올라오는 기사를 보니 신선하고 좋아요. ‘이런 게 신문 기사였지…’ 하고 새삼 신문 읽던 기억이 나요.”
인스타그램 ‘6DP’ 팔로어들이 이 계정에 보내는 반응이다. 이 계정을 운영하는 진예정 씨(31)는 한 방송사의 라디오 PD다. 진 씨도 댓글을 남긴 팔로어처럼 지난날 신문의 매력에 빠졌던 이들 중 한 명이다. 30대가 되고 직장 생활을 하던 진 씨에게 갑자기 슬럼프가 찾아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돌파구를 찾던 진 씨는 불현듯 20대 초반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매체’였던 종이 신문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신문을 읽어 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지인, 친구들만 볼 수 있는 개인 계정에 자신이 읽은 신문 기사 관련 게시글과 감상을 짧게 올렸다. 그런데 주변 반응이 뜨거웠다.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었다. 진 씨는 자신처럼 종이 신문을 좋아하는 젊은 세대가 있음을 실감했다. 신문 읽기 ‘역주행’의 수요가 예상보다 많을 수 있다고 느낀 진 씨는 곧 ‘6DP’ 계정을 개설했다. 지금은 1만5000여 명의 팔로어와 함께 신문을 읽는다.
진 씨는 “신문을 읽으면, 입맛에 맞는 정보만 제공해 이용자를 편협한 시각에 갇히게 하는 ‘필터 버블’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며 “사진과 캡션(사진설명), 제목 등 지면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에 집중해 콘텐츠를 하나하나 곱씹을 수 있는 것이 신문의 매력”이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신문은 매력적인 읽을거리가 빼곡한 매체입니다. 손으로 직접 종이 신문을 넘기고, 밑줄을 치며 읽으면 그 콘텐츠를 ‘씹어 넘기고 있다’고 저절로 느껴져요. 앞으로 더 많은 팔로어들께 제가 느낀 재미와 매력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진 씨)
대학생 강지수 씨(24)는 ‘6DP’ 계정 덕분에 신문 읽기에 새롭게 눈을 떴다. 그는 “포털 사이트를 통해 기사를 읽으면 별 생각 없이 화면 스크롤만 내리면서 텍스트를 보게 된다”며 “지면 기사를 읽으면 기사 배치와 편집을 확인할 수 있고, 정보를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대학생 이수연 씨(24)는 ‘6DP’ 계정 콘텐츠를 즐기다가 다음 달부터는 자신도 신문을 구독하기로 했다. 이 씨는 “지면과 소통하는 느낌이 좋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직장인 김모 씨(25)는 “이 계정을 발견하고 어린 시절 신문 활용 교육(NIE·Newspaper In Education)을 하며 오려 붙이던 신문 지면을 떠올렸다. 원래 집에서 아버지만 신문을 보셨는데 한 달 전부터는 제가 가장 먼저 신문을 꺼내 읽는다”고 했다. 이 계정의 한 팔로어는 “인스타그램 사용자들에게 종이 신문의 매력을 알리는 계정을 만들어줘 정말 감사하다”는 댓글을 남겼다.
● ‘오래된 것’의 고유한 재미
2030세대 사이에서 LP판의 인기도 만만치 않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김애림 씨(35)는 LP 음반 수집가다.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월 1만 원 정도를 내면 전 세계의 다양한 인기 음악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지만, 김 씨는 수십만 원을 들여 턴테이블을 마련하고 LP판을 구매해 음악을 즐긴다. 김 씨는 “단순히 음악 감상이라고만 생각하면 LP 음반을 통한 청음이 비싸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LP는 음악을 듣기까지의 매 순간이 가치 있는 과정이 된다”고 말했다. 김 씨는 “문득 음악이 필요한 순간에 앨범을 하나하나 만지며 고르는 과정의 설렘, LP판을 조심스럽게 꺼낼 때 느껴지는 소중함이 좋다”고 했다.
LP 음반을 수집하는 양모 씨(30)도 “LP 음반은 가격도 만만치 않고, 한 판에 수록된 곡의 수도 한정돼 있기 때문에 정말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신중하게 고를 수밖에 없다”며 “‘최애’ 가수의 소중한 LP 음반을 직접 만지고 소장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LP판을 턴테이블에 올리고 바늘을 내려놓을 때 들리는 ‘치직’ 소리도 이들이 꼽는 LP의 매력이다.
실제 LP판을 찾는 젊은층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예스24에 따르면 LP 상품 구매자 중 20대와 30대를 더한 비율은 2019년 27%에서 2021년 40.8%로 크게 늘었다. 2017년 문을 연 국내 유일 LP판 제작업체 ‘마장뮤직앤픽처스’ 관계자는 “지난해 주문량이 2020년에 비해 2.5배가량으로 늘었다”면서 “최근 공장 가동 시간을 늘렸다”고 했다. 현대카드가 운영하는 음반 판매점 ‘바이닐앤플라스틱’ 관계자는 “매장 방문 고객 중 젊은층이 많아 최신 인기 아티스트들의 한정판 음반을 만들어 선착순 판매하는 서비스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LP 음반을 찾는 고객의 연령대가 낮아지면서 이들의 감성에 맞춰 디자인된 상품도 나오고 있다. LP판은 검은색이라는 통념을 깨고 흰색, 빨간색, 파란색 등 다양한 색상으로 제작돼 젊은 세대의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LP판이 제작되고 있다. 이른바 ‘컬러반’이다. 흩뿌린 듯한 무늬가 인쇄된 ‘스플래터’를 비롯해 다양한 디자인의 LP판이 시험 제작되기도 한다.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 데이식스 등 인기 아이돌 가수들도 팬들을 위해 LP 앨범을 출시했다. 한 대형기획사 관계자는 “젊은층의 팬들에게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LP 음반 발매를 꾸준히 병행하고 있다”고 했다.
사라지던 필름 카메라도 젊은층에게 다시 ‘핫한’ 아이템이 됐다. 4일 서울 중구에 있는 필름 카메라 숍 ‘필름로그’는 이날 오후 약 1시간 동안 매장을 찾은 손님 8명이 모두 20대였다. 배상인 필름로그 팀장은 “매장을 찾는 손님의 90%가 2030세대”라며 “이 연령대 손님들은 저렴한 일회용 카메라나 이를 재활용해 만든 ‘업사이클링 카메라’를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이 매장처럼 필름 카메라를 판매하면서 사진관처럼 현상도 해주는 가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 부모 세대와 교감 매개
이처럼 오래된 물품을 찾는 젊은 세대의 특징 중 하나는 ‘물성’을 즐긴다는 것이다. 물질이 가지고 있는 성질이라는 뜻의 물성은 최근 몇 년 사이 이어지는 ‘역주행’ 열풍을 설명할 수 있는 핵심 단어다. 콘텐츠를 디지털 방식으로 소비하는 대신 아날로그 매체를 통해 보다 밀접하게 손으로 느끼고 만지며 향유하는 트렌드를 설명해 준다.
대학생 박민영 씨(25)는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도서관 이용이 어려워지면서 전자책을 자주 이용했다. 하지만 3개월 뒤 다시 종이책을 꺼내들었다. 박 씨는 “전자책을 읽고 나서야 내가 종이책 페이지를 넘기는 느낌 자체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디지털 콘텐츠는 손쉽게 복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혼자 향유한다는 감각을 갖기 어렵다”며 “디지털 콘텐츠가 범람할수록 ‘원본’에 대한 욕구와 갈망이 커지고, 디지털 세계에서 느낄 수 없는 ‘촉각’ 같은 실재하는 감각도 중시된다”고 말했다. 이어 김 교수는 “젊은 세대가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책, 음악 등 특수한 콘텐츠 영역에서 ‘물성’을 느끼고 싶은 욕망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유행은 부모 세대와 손쉽게 소통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대학생 신명길 씨(24)는 아버지를 따라 취미로 LP 음반 수집을 시작했다. LP 애호가인 아버지가 오래된 재즈 LP 음반을 2017년 신 씨에게 선물하면서부터다. 신 씨는 아버지에게 LP판 관리 방법 등에 대한 조언을 자주 구한다고 했다. 신 씨는 “본격적으로 LP 문화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는 부모님과 중고 LP 음반 매장을 방문하는 일이 늘었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에서 46년째 LP 음반 판매점 ‘서울레코드’를 운영 중인 황승수 사장은 “LP를 즐겨 듣던 부모님과 새롭게 LP를 찾게 된 2030세대가 함께 매장을 방문하는 모습도 최근 종종 보인다. LP 레코드를 통해 세대가 교감하는 모습이 즐겁다”고 말했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것이 취미인 이수빈 씨(26)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필름 카메라에 관심을 갖게 이 씨는 어느 날 오래전부터 집안 구석에 놓여 있던 부모님의 필름 카메라가 떠올랐다고 했다. 이 씨는 “오래된 카메라에서 어머니가 찍어둔 필름을 발견하고 어머니와 함께 현상소에서 이 필름을 인화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기성세대가 향유하던 문화를 젊은 세대가 재발견하고 함께 즐기는 건 서로 다른 세대가 소통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라며 “자연스럽게 세대 간 공감대도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의 ‘뉴트로’ 유행은 옛것의 답습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며 “청년 세대는 오래된 것을 계속 혁신하고 재해석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채연 기자 ycy@donga.com 이승우 기자 suwoong2@donga.com 전혜진 기자 sunri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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