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실험적 문체로 담아 후대 아시아계 작가와 예술가, 연구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예술가 차학경의 부고가 40년 만에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게재됐다. 10일(현지 시간) NYT 부고면(18면)의 ‘빠뜨릴 수 없는 인물’ 시리즈를 통해서다.
이 시리즈는 NYT가 충분히 조명 받아 마땅함에도 다루지 못했던 인물을 재조명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와 위안부 피해 최초 증언자인 김학순 여사의 부고도 이 시리즈로 소개된 바 있다.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난 차학경은 11세에 가족과 미국으로 이주했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에서 예술과 비교문학을 공부하고 퍼포먼스, 영상 작품을 남긴 그의 대표작은 1982년 출간된 책 ‘딕테’다.
딕테는 작가의 삶과 역사 속 이야기를 전위적인 문체로 엮은 작품이다. 작가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글은 잔 다르크, 유관순 열사, 그리고 만주 출신으로 중국과 한국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한 작가의 어머니 이야기가 얽혀 있다. 주로 영어로 쓰여 있지만 한국어와 프랑스어도 번역 없이 섞여 있어 난해한 글로 꼽히기도 한다. 캐시 박 홍 럿거스대 교수는 “학생들에게 이 글을 새로운 언어를 배우듯 접근하라고 조언한다”며 “독자는 차학경이 느낀 감정의 퍼즐을 풀어나가는 탐정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이른 시기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목소리를 냈다는 것만으로 차학경은 후대에 영감을 주고 있다고 NYT는 보도했다. 소설 ‘파친코’의 작가 이민진은 NYT에 “나와 같은 (한국인이라는) 배경을 가진 사람이 (미국에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차학경이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2019년 미국에서는 ‘딕테’ 강독회가 두 차례 열렸으며, 대학의 아시아계 미국인 역사나 페미니즘 강좌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딕테’는 1982년 9월 출간된 뒤에도 뉴욕 독립서점 베스트셀러 목록 5위에 오르는 등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차학경은 책 출간 두 달 만에 뉴욕의 한 건물 관리인에게 성폭행 당한 뒤 살해됐다. 그녀의 시신은 사건 현장에서 몇 블록 떨어진 주차장에서 발견됐으며, 범인은 플로리다로 도주한 뒤에도 연쇄살인을 저질러 5년 뒤인 1987년 종신형을 선고 받고 현재까지 복역 중이다.
이후 1993년 미국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그녀의 회고전이 열렸으며, 버클리미술관은 1992년부터 차학경의 기록을 수집·연구하는 ‘차학경 아카이브’를 운영하고 있다. ‘딕테’는 1995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재출간됐다. 차학경의 오빠 존 차는 NYT에 “동생은 자신의 책이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녀가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어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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