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에 이어 ‘제2의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산업에서 기술 유출 우려가 불거지고 있다.
3일 관계 당국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LG엔솔)은 올해 초 미국 제너럴모터스(GM)로부터 민감한 기술 정보를 공유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LG엔솔은 GM과 배터리 합작회사를 설립하고 미국에 공장 세 곳을 세우기로 한 상태다. GM 측은 합작회사 관련 협상 과정에서 배터리 안전성 확인을 이유로 배터리 실험 결과 등 제조 노하우를 알아낼 수 있는 민감한 기술 정보를 요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SK온과 배터리 합작사를 설립한 미국 포드도 SK 측에 배터리 내부 충전재의 밀도와 관련된 기술 정보 공유를 요구했다. 이 같은 사실은 양측이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포드 측이 한국 정부에 해당 기술이 유출 금지된 국가핵심기술에 해당되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삼성SDI도 미국의 신생 전기차 업체 리비안과 배터리 협력을 논의하던 중 기술 공유를 무리하게 요구해 오자 논의가 결렬된 것으로 알려졌다.
GM, 포드 등 미국 완성차 업체들은 배터리 기업 의존도를 낮추고 전기차 배터리를 직접 생산하는 ‘배터리 내재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 협력 기업과의 기술 유출 갈등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 업계 관계자는 “기술 유출 우려는 물론 완성차 업체의 배터리 내재화 시간을 단축해 한국 배터리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GM, LG엔솔에 실험데이터 요구… 포드는 SK온에 기술공유 주장
배터리 기술유출 ‘경고등’
3일 관계당국 등에 따르면 한국 배터리 업체들이 미국 완성차 업체들과의 합작 사업 과정에서 기술 공유와 관련해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 차원에서 기술 보호를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는 실제 LG에너지솔루션(LG엔솔)에 안정성과 직결되는 배터리 출력 관련 실험 데이터를 구체적으로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GM은 배터리 안정성 확보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실험 데이터를 역추적하면 배터리 설계 및 제조 관련 핵심 노하우와 기술력이 그대로 노출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 배터리 전문가는 “작은 정보라도 완성차 업체들에는 큰 도움이 된다. 음식으로 치면 당도 데이터를 보고서 첨가물을 어떤 비율로 넣었는지 유추하는 셈”이라고 했다. 이어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완성차 업체가 어느 날 갑자기 배터리 회사를 건너뛰고 소재 회사를 직접 접촉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 포드도 SK그룹 배터리 업체인 SK온과 배터리 합작 방안을 조율하면서 배터리 밀도와 관련한 기술 공유를 요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협상 과정에서 ‘산업기술 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된 배터리 설계, 제조, 평가 기술 공유가 어렵다는 얘기가 나오자 포드 측은 지난해 9월 산업통상자원부를 직접 방문해 “전기자동차용 2차전지 기술 유출을 방지하는 법이 실제로 있느냐”고 질문하기도 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포드와 SK온이 기술 공유를 놓고 줄다리기를 벌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배터리 업체들은 시장 선점과 고객사 이탈 방지, 공급처 확보를 위해 완성차 업체들과의 합작을 추진해 왔다. 완성차 업체들 역시 차값의 40∼60%인 배터리를 안정적이고 낮은 가격에 공급받고자 손을 맞잡았다. LG엔솔은 2019년 GM과 전기차 배터리 합작사 ‘얼티엄셀스’를 설립한 뒤 미국 오하이오주와 테네시주에 1, 2공장을 짓고 있다. 지난달 26일 3번째 배터리 합작 공장 건설을 발표한 데 이어 이달 3일 4번째 공장 건설 계획까지 추가로 공개했다. SK온도 지난해 9월 포드와 13조 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SDI는 미국 스텔란티스와 합작법인 설립 계획을 내놨다.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구조지만 내면에는 기술 유출이라는 ‘화약고’를 안고 있다. GM, 포드 등 완성차 업체들은 궁극적으로 배터리를 자체 생산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어서다. 합작법인은 배터리 자체 생산 역량을 확보하기 위한 중간 단계라는 지적도 있다. LG엔솔은 LG화학으로부터 물적 분할되기 전인 2019년 콘퍼런스콜에서 “합작법인 설립은 안정적 거래처 확보는 가능하지만 핵심 기술 유출 가능성이 있어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배터리 회사들은 협력사이자 고객사인 완성차 업체들의 요구를 마냥 거절할 수도, 해 달라는 대로 기술을 그대로 내어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기술 유출 위협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가핵심기술이 가장 많이 있는 반도체의 경우 합작사업 형태가 없어 배터리와는 사정이 다르다.
정부는 지난해 7월 배터리 밀도와 소재 함량 비율 등의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새로 지정했다. 지난달 25일 국무회의에서는 2차전지 산업 등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첨단전략산업 특별법’이 의결됐다. 그러나 산업과 기술을 보호하는 데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고위 관계자도 “앞으로 핵심 기술 유출은 물론이고 인력이나 원가 구조 같은 정보를 노리는 곳이 많아질 것”이라며 “산업의 구조적 특성을 감안해 종합적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미국은 해외로 기술을 이전하는 경우 중요 기술과 인프라는 물론이고 보유 기술 전체를 외국인 투자위원회(CFIUS)가 국가 안보 관점에서 심사하는 과정을 2018년 명문화했다. 일본은 기술 유출이 다양한 경로로 이뤄질 수 있다고 보고 관계 부처가 기술 유출 정보를 수집·공유하면서 대책을 추진하고 있다.
장항배 중앙대 산업보안학과 교수는 “한국 배터리 업체들이 글로벌 선두권이라 기술 유출 위협을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며 “정부도 조인트벤처나 인수합병(M&A)에 대해서는 과거 기술 보호 접근 방법과는 다른 제도적 정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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