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침략을 중단하라. 이곳은 우크라이나 땅이다.” 지난달 22일(현지 시간) 러시아 국경에서 불과 40여 km 떨어진 우크라이나 북동부의 하리코프를 찾았다. 영하 13도의 매서운 날씨에도 도심에서는 200여 명의 시민이 우크라이나 국기를 흔들며 서로 손을 잡고 인간 띠를 형성했다.》
현장에서 만난 시민 아호슬라프 씨는 “하리코프는 물론이고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인간 띠를 만들어 러시아에 항의할 것”이라며 “러시아의 침공 위협이 커질수록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해야 한다는 여론 또한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나토 동진’ 놓고 동상이몽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10만 대군을 보내 현재의 전쟁 위기를 조성한 장본인이다. 그는 줄곧 그 이유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과 나토의 동진(東進)을 좌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직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까. 바로 나토가 태생부터 러시아 견제를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기 때문이다.
나토는 1949년 4월 설립됐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12개국이 옛 소련에 맞서기 위해 군사안보 동맹을 만든 것이 시초다. 이후 서독 스페인 그리스 터키 등이 가세했고 소련 붕괴 후에는 발트3국 등 소련에 속했던 나라, 폴란드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등 동유럽 국가까지 대거 참여해 현재 30개국, 약 35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소련 역시 1955년 이웃 공산권 국가를 규합해 바르샤바조약기구(WTO)란 군사협력체를 창설해 나토에 대응했다. 하지만 소련 붕괴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소련 붕괴 후 나토에 가입한 상당수 동유럽권 국가는 과거 바르샤바조약기구에도 속했던 나라들이다. 러시아는 이 점을 특히 못마땅해하며 “동유럽 국가가 속속 나토에 가입해 이들과 국경을 맞댄 러시아의 자위권이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러시아는 서방이 독일 통일 당시 “나토의 동진은 없다”는 구두 약속을 했다고도 주장한다. 1990년 초 제임스 베이커 당시 미 국무장관과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독일 통일에 미온적이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설득하기 위해 “나토가 동진하지 않을 테니 소련 또한 독일 통일을 지지해 달라”고 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를 서면으로 된 공식 보장과 동급으로 여겼고 통일을 지지하기로 했다.
당시 베이커의 상관인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나토 동진 중단’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이후 고르바초프가 실각했고 애초부터 서면 약속이 없었던 탓에 서방과 러시아는 나토의 동진 여부를 놓고 상반된 시각을 갖게 됐다.
푸틴 대통령은 2008년 조지아 침공,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합병, 현재의 우크라이나 전쟁 위기가 모두 나토의 동진에 따른 것이며, 러시아는 방어권을 행사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서방이 러시아를 속이고 나토를 확장하고 있다”는 시각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서방은 “나토가 새 회원국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맞선다. 특정 지도자의 구두 언급이 나토의 공식 조약을 대체할 수 없다는 논리다.
우크라 나토 가입, 14년째 답보
우크라이나는 2004년 오렌지 혁명으로 반러 정권이 무너진 후부터 주로 친서방 노선을 걸었고, 나토 가입도 추진해 왔다. 나토 역시 2008년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의 가입 여부를 논의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14년이 지난 지금도 우크라이나의 가입은 답보 상태다. 나토에 속하려면 정치, 경제, 법 등 사회 전반의 상황이 나토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 우크라이나는 고질적인 부정부패, 사회 불안정 등을 이유로 가입의 전 단계로 여겨지는 ‘회원국 자격 행동 계획(MAP)’ 지위조차 획득하지 못했다. 러시아의 반발은 둘째 문제다. 우크라이나의 후원자를 자처하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조차 지난달 19일 “가까운 시일 내에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했다.
우크라이나로선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은 나토 가입을 이유로 러시아로부터 침공 위협을 받고 있는 셈이니 억울할 수 있다. 칼 빌트 전 스웨덴 총리는 “2008년 나토가 우크라이나에 가입 논의를 약속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에 기대감을 심어주면서 러시아에는 과장된 두려움을 안겼다는 것이다.
스웨덴·핀란드의 반러 행보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을 알면서 무력 위협을 하고 있는 푸틴 대통령의 행보 또한 반감을 사고 있다. 특히 지난해 12월 24일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이 “스웨덴과 핀란드가 나토에 가입하면 심각한 군사적, 정치적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 상당한 역풍을 부르고 있다. 그간 중립국을 이유로 서방과 러시아 모두와 거리를 뒀던 스웨덴과 핀란드에서도 나토 가입을 논의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다. 러시아가 긁어 부스럼 상황을 자초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산나 마린 핀란드 총리와 사울리 니니스퇴 대통령은 지난달 1일 신년사를 통해 “핀란드는 언제든 나토 회원국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안보정책을 결정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안 린데 스웨덴 외교장관 또한 “각 나라는 스스로 안보 정책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가세했다.
나토 변화 배경엔 中 도전도
러시아의 위협이 나토엔 오히려 입지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나토의 동진이 러시아를 자극하고, 러시아는 이를 빌미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겠다며 나토를 압박하면서 희미해져 가던 나토의 정체성이 회복될 수 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나토는 시대 변화에 맞춰 기존의 군사안보 동맹 위치를 넘어서려는 행보 또한 보이고 있다. 나토는 최근 해킹, 가짜 정보 등 다양한 수단을 이용하는 ‘하이브리드 전쟁’에서의 억제력을 강화하는 방안 또한 2030년까지 마련하기로 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인공지능(AI)이 세계 안보에 미치는 위협에 대응하는 전략을 발표했고 회원국의 민주주의 발전 등 사회 전반의 변화 또한 돕겠다는 방침도 세웠다.
그 배경에 최근 급부상한 ‘중국’이 있다고 BBC는 분석했다. 나토는 2020년 6월 중국을 ‘국제질서와 회원국 안보에 대한 구조적 도전’이라고 정의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중국은 장거리 미사일, 사이버 능력, 새로운 기술 등으로 나토 안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동맹국을 중국의 위협에서 어떻게 보호할지가 다음 10년을 위한 새 전략 과제”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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