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6월 조선 군사들이 궁궐에 난입한 직후 일본과 청은 즉각 출병에 나선다. 일본이 군함과 300명의 병력을 제물포로 보낸 데 이어 청이 광둥(廣東) 주둔군을 중심으로 3000명의 병력을 남양만에 상륙시킨다. 일촉즉발의 위기에 양국 간 교섭이 시작되고, 청군은 군란의 배후에 있던 대원군을 톈진(天津)으로 납치하기에 이른다.
미국 캘리포니아 데이비스대(UC데이비스) 교수로 동아시아 근대사를 연구한 저자는 이 책에서 19세기 후반 한중일 3국 간 국제관계가 근대 세계질서로 편입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저자는 특히 중국 중심의 조공 체제가 와해된 역사적 사건으로 임오군란을 바라보고 있다. 당시 청은 군란을 진압한 후에도 한반도에 군대를 계속 주둔시키며 조선 내정에 깊이 간여했다. 이는 유교 질서에 따라 종주국으로서 의례적 권한만 행사할 뿐, 조공국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조공 체제 전통과 어긋나는 행태였다.
중국이 이처럼 팽창주의로 기운 건 당시 일본, 러시아의 동아시아 침투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북중국은 물론 수도 베이징과도 멀지 않은 한반도는 자국 안보에 있어 핵심 완충국이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과 굴욕적 외교 조약을 맺은 청이 조선에 열강과의 조약을 통한 개항을 요구한 점이다. 이는 서구 열강들을 끌어들여 일본,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이른바 변형된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조선이 대등한 주권국 간의 외교 행위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 세계질서’에 편입되는 걸 의미했다. 다시 말해 이 책 제목이 암시하듯 종주국을 정점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질서가 사라지는 종막(終幕)이었던 셈이다.
최근 베이징 겨울올림픽 판정 논란으로 반중 정서가 팽배한 가운데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이냐가 화두가 되고 있다. 6·25전쟁의 분수령이 된 마오쩌둥의 참전 결정 이전에 19세기 청의 팽창주의가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세계질서를 바꾼 한 축이었음은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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