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판에 ‘적폐청산’이 다시 등장했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9일 공개된 언론 인터뷰에서 ‘전(前) 정권 적폐청산 수사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해야죠. (수사가) 돼야죠”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현 정부를 근거 없이 적폐 수사의 대상, 불법으로 몬 것”이라며 대통령국민소통수석을 통해 공개적으로 ‘강력한 분노’를 표출했다. 공식 선거운동 시작(15일)을 눈앞에 두고 대선판이 진영 간 대충돌로 치달을 태세다. 적폐청산 시즌3에 불씨가 댕겨진 모양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생경한 단어였던 적폐청산이 정치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60년간의 적폐청산 구상을 밝히면서다. 이후 2017년 대선 때 문재인 대통령은 “적폐청산은 시대정신”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을 전후해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이 주창했던 적폐청산의 이름 아래 구속됐고, 이명박 전 대통령도 감옥에 갇혔다. 문 대통령은 5년 전 취임사에서 “감히 약속드린다. 2017년 5월 10일 이날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되는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결과는 달랐다.
적폐청산을 국정과제 1호로 삼았던 정부는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이분법 통치를 국정의 동력으로 삼았고, 분열은 극에 달했다. 거의 모든 논쟁적 이슈의 옳고 그름이 진영논리에 따라 엇갈렸다. 과학의 영역인 코로나19 방역에 대한 평가에도 진영논리가 개입됐다. 정부 지지자들은 여권의 비상식과 위선이 드러나도 ‘문 대통령은 그래도 옳다’고 했고, 야권 진영은 늘 그 반대쪽에 섰다.
박 전 대통령이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지난해 말 풀려났다. 이 전 대통령은 수감 중이다. 민주주의와 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국가에서 보기 드문 전직 대통령 수난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 모든 게 적폐청산 아래 벌어진 일이다. 적폐청산과 국민통합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다는 것을 지난 5년 동안 모두가 지켜봤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은 최순실 사태와 박 전 대통령 탄핵이 발화점이 됐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이 저류에 깔려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과도한 보복을 받았다고 굳게 믿는 집단은 자신들을 피해자라고 여기고 권력 의지를 다진다. 그리고 힘을 가지게 되면 ‘정의’를 앞세워 가해자로 변하곤 한다. ‘오랫동안 켜켜이 쌓여 온 불법과 반칙을 없앤다’는 적폐청산은 그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권력이 앞장서는 순간 정치보복으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후보·배우자를 둘러싼 비호감 대선에 진영 간 감정 대결이 더욱 격해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누가 승자가 돼도, 패자는 승복보다는 치욕감을 되새기며 집권의 기회만 엿볼 가능성이 크다. 논쟁적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지지층을 선동해 광화문광장으로 뛰쳐나갈 수도 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데는 5년 동안 통합을 외면하고, 적폐청산에 몰두한 문 대통령과 여권의 책임이 크다. 그렇다고 “우리가 당했으니 너희도 똑같이 당해 보라”는 것은 공멸의 지름길이다. 대선은 새로운 대한민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비극적인 노 전 대통령 사태 이후 20년 가까이 우리 정치에서 반복돼 온 극한 대립 구도와 적폐청산의 악순환을 이제는 끊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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