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부인 김건희 씨가 허위 이력 의혹으로 공개석상에서 사과한 데 이어 더불어민주당(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부인 김혜경 씨도 ‘과잉 의전’ 및 ‘법인카드 유용’ 논란으로 2월 9일 사과했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 여야 거대 양당의 대선 후보 배우자가 모두 도덕성 논란으로 국민에게 머리를 숙인 것이다. 지금까지 대선은 후보자들이 능력이나 도덕성 검증을 놓고 서로 맞붙었으나 이번에는 ‘사고뭉치’ 아내들 간 맞대결이 주요 변수로 부상했다는 점에서 이례적 국면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감이 높아질까 우려된다”고 입을 모았다.
김혜경 씨는 2월 9일 서울 영등포구 민주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공직자의 배우자로서 공과 사 구분을 명확히 해야 했는데 많이 부족했다”며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부족함의 결과”라고 말했다.
대선 후보 도덕성 타격 가능성
김혜경 씨와 김건희 씨를 둘러싼 논란은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우선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당사자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하고, 배우자인 두 대선 후보의 도덕성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설 연휴를 앞둔 1월 28일 전직 경기도청 7급 공무원 A 씨가 언론을 통해 “전직 경기도 5급 공무원 배모 씨의 지시로 김혜경 씨의 사적 심부름을 했다”고 주장했다. △호르몬제를 대신 처방받아 김 씨에게 전달했고 △김 씨 자택으로 쇠고기, 초밥 등 음식 배달을 했으며 △이 후보 친척들에게 명절 선물을 전달했다는 것이 A 씨 폭로의 뼈대다. 김 씨가 경기도청 비서실 법인카드를 사적으로 썼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김건희 씨는 2001~2016년 5개 대학 시간강사·겸임교원 임용 당시 제출한 서류에 허위 이력을 기재했다는 의혹을 샀다. △초중고교 교생실습 경력을 ‘정교사’로, 시간강사 경력을 ‘부교수(겸임)’로 각각 기재하고 △협회 및 기업 재직 기간과 직위를 오기했으며 △공모전 수상 실적을 허위로 적었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두 사람의 사과 모두 구체성이 없다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김건희 씨는 기자회견 당시 “일과 학업을 함께하는 과정에서 잘못이 있었다. 잘 보이려고 경력을 부풀리고 잘못 적은 것도 있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돌이켜보니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라면서도 질의응답 없이 구체적인 해명을 하지 않아 ‘해명 없는 사과’ 논란을 불렀다.
김혜경 씨는 기자회견장에서 낭독한 약 460자 분량의 사과문을 통해 “제가 져야 할 책임은 마땅히 지겠다. 수사와 감사를 통해 진실이 밝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면서도 A 씨에게 의약품 대리 수령 및 물품 구입 등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배모 씨에 대해선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사람”이라며 “오랜 인연이다 보니 때로는 여러 도움을 받았다”고 언급하는 데 그쳤다. “어떤 사실관계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도 “실체적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최선을 다해 (수사 및 감사에) 협조하고 응분의 책임이 있다면 책임질 것”이라며 상세한 답변을 피했다. 질의응답 없이 기자회견을 마쳐 논란이 일었던 김건희 씨의 선례를 의식한 듯 취재진 질문에 응했으나 사실상 사과문 내용을 반복한 셈이다. 제보자 A 씨는 김혜경 씨 기자회견 후 입장문을 내고 “(김 씨가) 꼭 답해야 하는 질문에는 하나도 정확히 답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노동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김혜경 씨의 이번 사과에서도 김건희 씨와 마찬가지로 의혹의 사실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는 듯한 태도가 보인다”면서 “자칫 법적 책임을 질 수도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고 평가했다. 노 교수는 “김혜경 씨의 사과 내용을 살펴보면 ‘불찰’ ‘부족함’이라는 표현으로 일관하는 등 기존 입장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며 “관점에 따라서 배모 씨가 ‘알아서 한 것’이라는 뉘앙스로 읽힐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감성 vs 이성
다만 말하기 방식에선 두 사람의 사과가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김건희 씨는 “결혼 후 남편이 겪은 모든 고통이 다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국민을 향한 남편의 뜻에 내가 얼룩이 될까 늘 조마조마하다”며 남편 윤 후보에 대한 미안함을 드러내는 등 감정에 호소했다. 반면 김혜경 씨의 사과문은 서두에 “이재명 후보 배우자 김혜경입니다”라는 구절 말고는 ‘이재명’ ‘남편’ 등의 언급을 피했다. 표현이나 어조도 감성보다 이성 위주로 읽힌다. 정치인과 기업가의 이미지 컨설팅을 오랫동안 자문해온 퍼스널이미지브랜딩LAB&PSPA의 박영실 박사는 “김건희 씨 사과가 국민에게 감성적으로 접근했다면 김혜경 씨 사과는 이성적 부분으로만 구성됐다”며 “사과문 낭독 후 질의응답을 통해 김건희 씨와 차별화를 시도했으나 기자 질문에 더 구체적으로 답변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두 사람은 차림새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검은색 위주의 정장과 풀메이크업에 가까운 화장을 하고 등장한 김건희 씨와 달리 김혜경 씨는 베이지색 중심의 옷차림에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화장으로 나타났다. 그 배경에 대해 이명박 전 대통령과 대선 후보 시절 문재인 대통령의 스타일을 컨설팅한 윤혜미 퍼스널 브랜딩 전문가는 “두 사람의 사과 화두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라며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김건희 씨는 허위 이력 논란에 대해 자신의 전문성을 강조해야 했기에 블랙 슈트로 점잖음과 세련됨을 보이고자 했다. 반면 김혜경 씨의 경우 자신이 갑질을 했다는 의혹을 해명해야 하므로 베이지 톤의 의상으로 선하고 겸손한 태도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김혜경 씨 사과에는 민주당 측의 위기감이 반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당초 민주당 지도부에선 “이것(김혜경 씨 논란)보다 김건희 씨가 검찰총장 부인이라는 이유로 한동훈 검사장과 ‘검언유착’ 당시 4개월간 9차례 전화하고 332차례 카카오톡을 주고받은 자체가 심각한 문제”(2월 2일 민주당 송영길 대표 언론 인터뷰)라는 등 ‘맞불’ 작전을 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여론이 악화되자 기자회견을 통한 당사자 사과로 가닥을 잡은 듯하다. 당초 주변 만류에도 기자회견을 강행한 것으로 알려진 윤 후보-김건희 씨와 비슷한 행보다.
이 과정에서 이재명 후보의 고심도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후보는 2월 3일 서면 입장문을 통해 “지사로서 직원의 부당행위는 없는지 꼼꼼히 살피지 못했고 제 배우자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일들을 미리 감지하고 사전에 차단하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최근 이 후보를 사석에서 만난 정치권 한 인사는 “(이 후보가) 최근 부인 관련 논란 때문인지 이전보다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고 전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최민희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미디어특보단장 등 일부 민주당 인사가 김 씨 관련 의혹을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으나 선거를 앞두고 여론이 안 좋아지자 뒤늦게 사과한 모양새”라며 “안 한 것보다야 낫지만 타이밍이 좀 늦은 감이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공직자 갑질에 대한 경계, 명확한 공사 구별은 이 후보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것이기에 논란의 파급력을 무겁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도 “김 씨를 둘러싼 논란은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니며, 최근 이 후보 지지율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 한다”면서 “김 씨가 기자회견에서 ‘공사 구별을 못 해 죄송하다’ ‘수사·감사에 대해 책임지겠다’고 한 대목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섣부른 공격, 역풍 부를 수도”
전문가들은 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 자당 대선 후보의 배우자 리스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 소재 한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는 “국민의힘 측이 김건희 씨 논란으로 홍역을 치른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며 “여론조사에서 이 후보와 윤 후보 지지율 차이가 크지 않은 초박빙 상황에서 섣부른 공격은 역풍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책 대결 없이 극한의 네거티브 선거 전략으로 상대 후보는 물론, 배우자까지 겨누는 상황은 정치 발전을 저해한다”고 덧붙였다. 이준한 교수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 2위를 다투는 유력 대선 후보의 부인들이 여러 의혹에 휘말려 사과하는 것 자체가 한국의 선거정치, 대통령제도 퇴보로 이어질까 우려된다”며 “이른바 배우자 리스크가 각 당과 후보에게 어떻게 작용할지라는 문제를 떠나 정치에 대한 국민의 혐오감과 불신감을 조장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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