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를 다치고 깨달은 것[2030세상/김지영]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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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깁스를 했다. 금요일 퇴근길, 만원 버스의 하차 전쟁에 밀려 계단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내 딴엔 본능적으로 착지자세를 취했는데 그게 하필 발목이 꺾인 채였다. “괜찮으세요?” 사람들이 모여들자 부끄러운 마음에 후다닥 도망을 치고 싶었는데, “괜찮아요!”라고 외치는 말이 무색하게 일어설 수 없었다. ‘망했다.’ 몇몇의 부축을 받아 정류장 벤치에 걸터앉은 채 보호자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넘어진 경험이야 남부럽지 않게(?) 차고 넘치는데 놀랍게도 깁스는 처음이었다. 통증이 어느 정도 가시고 살 만해지자 처한 상황을 조금은 긍정하게 됐다. ‘액땜했다 치자. 이만하길 다행이야!’ 목발 인증샷을 찍어 나르며 쏟아지는 관심과 걱정을 즐기기도 했고, 다행히 동거인이 있어 이런저런 귀찮은 시중을 들어주는 것은 사실 조금 신나기까지 했다. 환승만 세 번을 거치는 편도 1시간 15분의 출근길은 ‘하는 수 없이’ 택시로 대체됐다. 운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은 한편 운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당위를 제공해 주었고, 마음 편히 나태해졌다.

‘안에서는’ 솔직히 단점보다 장점이 많았다. 하지만 밖을 나서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졌다. 목발이라는 렌즈를 통하자 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호등 불은 너무 짧았고, 계단은 너무 많았다. 퇴근 시간은 그래도 이른 편이라 되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했는데,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승차 문과 하차 문 사이의 이동은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위험하고 아득했다. 한번은 기사님께 정중히 “저 다리 때문에 죄송한데 앞문으로 좀 내려도 될까요?” 여쭈었다가 “그럼 미리 뒷문으로 이동했어야지” 하는 면박을 들었다. “죄송합니다”라고 인사하고 내려 절뚝이며 걷는데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뭐가 죄송하지?’

그래도 대부분의 기사님들은 곁눈질로 목발을 한 번 쓰윽 보고는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서너 번의 세찬 끄덕임이 묘하게 든든했다. 말 한마디 없어도, 한 칸 한 칸 조금씩 내딛는 걸음을 인내심 있게 따라붙는 시선이 은밀하게 다정했다. 친절과 불친절 모두에 대한 감도가 높아졌지만, 본디 크게 낙관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더 크게 와닿는 것은 대체로 친절 쪽이었다. 많은 이들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몸으로 문을 밀어 열다가도 뒤를 흘끗 보고는 재빨리 문을 잡아주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 앉으세요!” 주저 없이 자리를 내어주었다.

종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훈훈한 몰래카메라 영상을 보며 ‘아직 세상 살 만하다’는 댓글을 주고받곤 했는데, 문득문득 지금 내가 세상을 몰래카메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대치 않았던 크고 작은 친절들을 수집하며 음흉하게 웃음 짓는다. 물론 가짜 깁스가 아니라는 것이 함정이지만. 연이은 흉흉한 사건사고와 삭막한 뉴스가 보여주는 사회의 단면 또한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진실’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세상은 우리 생각보다 아름답다.

뜻밖의 액땜으로 세상을 긍정하며 해를 시작한다. 그러니 몰래카메라는 이만하고, 이제 그만 깁스를 풀고 싶습니다만.

#다리#깁스#경험#단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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