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는 지금도 국내 스포츠 중계 사상 가장 유명한 멘트로 꼽힌다. 송재익 축구캐스터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최종예선 도쿄 방문경기에서 이민성의 역전골이 터지자 내지른 일성이었다. 일본의 자존심을 저격한 이 멘트는 당시 일본 언론에까지 다뤄질 정도였다. 세월이 지나 이번에는 한국 해설자가 일본 선수를 응원하다 눈물까지 흘려 일본의 반응이 뜨겁다. 베이징 겨울올림픽에서 나온 훈훈한 장면이다.
▷사흘 전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m 경기.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해설위원이 된 ‘빙속 전설’ 이상화가 절친이자 경쟁자였던 일본 고다이라 나오(36)의 경기를 중계하다 부진한 성적에 끝내 눈물을 흘렸다. 고다이라는 4년 전 평창 겨울올림픽 때 이상화의 올림픽 3연패를 저지하며 금메달을 따낸 라이벌이었다. 당시 대회를 끝으로 이상화는 은퇴했고, 세 살이 더 많은 고다이라는 현역으로 남아 이번 대회 2연패에 도전했다. 고다이라는 경기 뒤 공식 인터뷰에서 중계석의 이상화부터 찾으며 한국어로 “보고 싶었어. 저는 오늘 안 좋았어요”라고 했다.
▷둘의 우정에 일본 언론은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아사히신문은 “올림픽을 앞두고 이상화가 몇 번이고 보낸 격려 메시지에 고다이라가 마음 든든해했다”고 소개했고 요미우리신문은 ‘이상화 눈물에 감동 커져…. 우정에 국경이란 없다’고 보도했다. 마이니치신문은 ‘고다이라 17위에 라이벌 눈물’이라며 관련 내용을 전했다. 기사들에는 “눈물이 나왔다. 한일관계는 나쁘지만 둘의 관계는 멋지다. 같은 일본인으로서 고맙다”는 등의 댓글이 이어졌다.
▷4년 전 평창 대회에서도 둘의 우정은 뜨거웠다. 당시 올림픽 기록을 갈아치운 고다이라는 관중석이 열광하자 손가락으로 ‘쉿’이라며 이상화의 다음 경기를 배려했다. 2위로 통과한 이상화가 눈물을 흘리자 “여전히 너를 존경한다”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둘의 우정에 특별한 비결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래전 선수 대기실에서 이상화가 친근하게 말을 건넨 게 계기였고 고다이라는 이상화를 롤 모델로 훈련한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서로에 대한 인정과 배려가 우정을 키워온 것이다.
▷역대 한일 간 스포츠 경기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자존심 대결이곤 했다. 지난해 한 번 급조되기는 했지만, 매년 열리던 축구 한일평가전이 10년 이상 사라진 것도 과열 후유증이 한 원인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상화와 고다이라의 우정이 특별한 감동을 주는 것은 국가와 정치를 뛰어넘는 올림픽과 스포츠 정신 본래의 가치를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꼬일 대로 꼬인 한일관계를 푸는 첫 단추도 이처럼 작은 관심과 배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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