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신 네 켤레가 갤러리 한가운데 놓였다. 최대 71cm 길이의 짚신 주인은 코끼리. 사방에 배치된 스피커에서 물이 튀는 소리가 들린다. 코끼리들이 신발을 던져놓고 목욕을 하러 웅덩이로 떠나는 것 같다.
서울 종로구 PKM갤러리에서 열린 홍영인 작가(50)의 ‘위 웨어(We Where)’ 개인전에 출품된 설치미술 작품 ‘Thi and Anjan’(2021년)이다. 작가는 영국 체스터 동물원에서 숨진 할머니 코끼리 티와 손녀 코끼리 안잔을 위한 신발을 만들었다. 공동체를 이루며 살다 숨진 생명체를 기리는 작품이다.
1997년부터 영국에서 활동 중인 작가 홍영인은 이번 전시에서 신작 8점을 포함해 총 26점의 설치미술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주제는 공동체. 작가는 오랫동안 공동체 복원이나 자연과의 공존에 천착해왔다. 그는 “서로를 배척하는 수직적 사회가 아닌 다양한 주체가 공생하는 수평적 공동체를 꿈꾼다”고 말했다.
전시장 한편에 걸린 ‘One gate between two worlds’(2021년)는 사당 안 고릴라와 원숭이를 묘사한 대형 자수 작품이다. 사당을 그린 전통 민화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에서 착안했다. 감모여재도는 유교 제례의식에서 영적 세계와 실제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작품에서 사당 안 고릴라와 원숭이가 마치 공경받는 조상처럼 표현돼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역전된 듯하다. 홍영인은 “인간은 동물을 하등하다고 여기는 것 이상으로 타인을 배척하고 끊임없이 경계를 짓는다”고 말했다.
작품들은 짚풀 공예나 자수처럼 소외되고 있는 문화요소를 다룬다. ‘Woven and Echoed’(2021년)와 ‘A Colourful Waterfall and the Stars’(2021년) 같은 자수 작품이 많은 것도 과거 여성들의 자수가 예술로 인정받지 못한 점을 반영한 것. “제가 경험한 1970, 80년대 한국 역사는 너무도 남성적으로 쓰였다”는 홍영인은 당시 여성 직공들이 쓴 일기 속 문장을 자수로 놓았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잊힌 존재들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홍영인은 “늘 ‘어떻게 하면 예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동안 여성, 동물 같은 비주류를 대변한 예술적 시도는 많지 않았다. 미술은 아래로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말했다. 2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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