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안방에서 열린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2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 때만 해도 금메달이 이렇게 어려운 건지 아마 몰랐을 거다. 한국 여자 쇼트트랙의 명실상부한 에이스로 불린 최민정(24·성남시청)의 ‘다음’ 올림픽인 베이징 겨울올림픽 여정은 꽃길보다 가시밭길이었다.
지난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2위를 차지하며 태극마크를 달았던 그는 본격적으로 베이징 올림픽 시즌을 준비하던 시점에 생각지도 못한 논란의 주인공이 됐다. 평창 올림픽 당시 여자 1000m에서 심석희(25)와 부딪쳐 넘어지며 고배를 마셨는데, 3년 뒤인 지난해 심석희와 코치가 당시 주고받았던 문자가 공개됐고 고의 충돌 의혹이 불거진 뒤 피해자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한때 한솥밥을 먹으며 계주 금메달을 합작한 동료의 배신에 충격을 받은 최민정은 지난해 10월 대한빙상연맹에 “고의 충돌 의혹을 밝혀 달라”고 호소했다.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 겨우 심신을 추스르고 지난해 10월 중국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1차 대회에 나섰지만 무릎과 발목 부상을 입었다. 1차 대회 도중 귀국해 치료를 받았고 월드컵 2차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몸뿐 아니라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에이스는 달랐다. 올림픽이 가까워올수록 ‘여제’의 위용을 점차 회복해갔다. 부상에서 복귀한 그는 남은 월드컵 2개 대회에서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따며 부활했다. 최민정은 베이징 올림픽에 나서기 전 “쇼트트랙은 변수가 많은 종목이다. 평창 때보다 출전 종목이 많아졌고, 경험도 쌓인 만큼 더 좋은 성적을 보여드리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4년 전 아픈 기억으로 남았던 여자 1000m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펑펑 울었던 최민정은 3000m 계주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고서야 활짝 웃으며 올림픽 분위기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쇼트트랙 경기 마지막 날인 16일 자신의 주 종목이자 쇼트트랙 마지막 종목인 1500m에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며 이번 대회 자신의 첫 금메달이자 통산 세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평창 대회에 이은 이 종목 2연패도 달성했다.
준준결선에서 남은 바퀴 수가 전광판에 뜨지 않는 등 국제대회에서 보기 힘든 해프닝이 생겼지만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단단해진 최민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준준결선부터 경쟁자들보다 2∼3m 앞선 채 결승선을 끊은 최민정은 준결선에서는 아예 올림픽 기록(2분16초831)을 갈아 치웠다. 결선에서 레이스 초반 한위퉁(28·중국), 쉬자너 스휠팅(25·네덜란드) 등이 오버페이스를 하는 상황에서도 제 페이스를 유지한 최민정은 레이스 중반부터 선두로 치고 나간 뒤 추격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레이스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아리안나 폰타나(32·이탈리아)가 은메달, 스휠팅이 동메달을 가져갔다. 최민정과 결선에 오른 이유빈(21·연세대)은 2분18초825의 기록으로 6위를 했다. 이번 시즌 월드컵 1500m에서 랭킹 1위를 하며 메달 기대를 모았던 이유빈은 이날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경기에서 초반 선두로 치고 나가며 자신의 기량을 맘껏 펼쳤지만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다.
최민정은 경기 뒤 “1500m 잘하고픈 마음이 컸다. 간절하게 준비한 만큼 결과가 좋아 행복하다. 너무 좋아서 (이 상황이) 안 믿긴다. 평창 때보다 더 기쁜 것 같다”며 “힘들게 준비한 과정들이 지금의 결과로 나온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 이어 “계주와 1000m에서 은메달 딴 것도 좋았지만 베이징에서 애국가를 꼭 듣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우승해서 내일 애국가를 들을 수 있게 돼 뿌듯하다”고 덧붙였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올림픽 마무리를 한 최민정은 동료들과 함께 활짝 웃었다. 태극기를 두르고 빙판 위를 도는 최민정의 어깨가 유난히 가벼워 보였다. 이제 꽃길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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