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하시는 일을 슬슬 정리하는 것은 어떠세요?” 조심스레 이런 말을 꺼내면 환자분들이 무척 긴장한다. 본인에게 남은 날이 얼마 없어서 의사가 주변 정리를 하라고 하나 보다 짐작한다. 사실 의사로서 이런 말은 꺼내기가 무척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이유는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맞는 죽음이 본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권해도 하던 일을 정리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 일할 땐 잡생각도 안 들고 시간도 잘 가고 좋은데, 일을 안 하고 있으면 심심하고 우울해서 더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분들 중에는 일을 놓는 순간 몸 건강뿐만 아니라 심리 상태도 확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마치 직장인이 정년퇴임 후 몹시 힘들어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이유로 임종 몇 달 전까지도 계속 일에 매달리는 환자가 생각보다 많다.
젊은 직장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회사에 영혼을 갈아 넣은 대가로 월급 통장에 한 달에 한 번 숫자가 찍혔다가 금방 카드 값으로 빠져나가고 다시 영혼을 갈아 넣는 무한 반복 루프 속에 있을 때이다 보니, 일하지 말라고 하면 너무 좋을 것 같다고, 죽을 때까지 일하는 건 너무 비참하다고 말한다. 특히 요즘처럼 자본 소득과 노동 소득의 격차가 커지고, 죽어라 일해도 아파트 한 채 못 사는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파이어족을 꿈꾸는 사람도 늘고, 노동의 가치가 폄하되는 사회에서 죽을 때까지 일을 놓지 못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 쉽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일이란 단순히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 이상이기도 하다. 일을 하면서 돈만 버는 게 아니다. 일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 배우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식견을 넓히고,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고, 가치 있는 일을 발견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중·고등학생 암 환자들도 비슷하다. 환자 보호자들이 말하기를, 아이들이 공부하라고 할 때는 안 하다가 암에 걸린 뒤에는 공부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고 해도 너무 열심히 공부해서 걱정이라고 한다. 사람에게는 공부건 일이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무언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일하기를 원하는 암 환자분들께 체력적으로 할 수만 있으면 하라고, 다만 죽기 살기로 일하지 말고 취미 삼아 하라고 권하곤 한다.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좋아하는 일이 있다는 것도 어쩌면 축복인지 모른다. 우리에게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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