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생전정리
年 130만 사망 ‘多死사회’ 돌입후, 죽음 준비자세 적극적으로 바뀌어
입관 체험-집 정리 순회 박람회도… 인형 보내는 불교식 다비식까지
“유언장 써보면 마음가짐 달라져… 상속분쟁 줄여 사회비용 절약
40代부터 시작 ‘老前정리’ 추천”
노인은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한다. 살아온 세월만큼 많은 물건들이 생기고 그것들마다 켜켜이 사연이, 추억이 쌓이기 때문이다. 전쟁과 가난 등 결핍의 시대를 겪어온 세대일수록 물건 버리는 것을 죄악시하기까지 한다. 장수시대에는 물건도 장수하기 쉬운 것이다.
초고령사회 일본에서는 ‘부모님의 집 정리’가 화두가 되고 있다. 대개 80∼100대 부모가 남긴 집의 정리를 50∼70대 자녀들이 맡게 되는데, 꽉꽉 들어찬 물건들에 경악하고 부모의 손때 묻은 물건들을 함부로 버릴 수 없어 난감해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자신과 가족을 위한 생전정리
지난해 출간된 ‘부모님의 집 정리’(즐거운상상)에는 일본의 50, 60대 자녀 15명이 고령에 접어든, 혹은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님의 집을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쳐 정리한 경험담이 담겨 있다.
치매가 진행 중인 부모님을 그룹홈(양로원)에 모신 뒤 월셋집인데도 5년이 걸려서야 집 정리를 완수한 50대 딸이 있는가 하면, 어머니 생전에 함께 정리를 시도했지만 물건을 버리면 도로 주워 오는 어머니의 완고함을 이기지 못하고 포기했던 딸도 있다. 물건으로 꽉 차 창문도 열 수 없게 된 집에서 생활하던 80대 노모가 입원한 틈을 타 정리한 딸의 얘기도 있다. 한결 깔끔해진 집에서 노모는 가끔 없어진 물건을 찾으며 불평을 하면서도 편안한 표정이라고 한다. 80대부터 “쓸 사람이 있으면 주고 싶다”며 물건들을 정리했던 할머니가 99세에 돌아가신 뒤, 최소한의 물건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며 감탄하는 며느리 사례도 있다.
누군가의 자식이지만 누군가의 부모이기도 한 이들은 훗날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미리미리 물건을 줄이겠다고 다짐한다.
○사망이 많은 일본의 ‘종활’ 붐
매년 약 130만 명이 사망하는 ‘다사(多死)사회’로 접어든 일본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삶의 마무리를 스스로 준비하는 종활(終活·슈카쓰)이 확산되고 있다.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단사리(斷捨離·끊고 버리고 떠난다는 뜻)’라는 말도 유행했다. 자신이 마주한 생활 속에서 진정 필요한 것만을 선택하는 일을 말한다. 남은 가족의 부담을 줄이고 자신의 쾌적한 삶을 위해 노인 스스로가 미리미리 자신의 물건과 관계를 정리해 가는 것이다.
종활은 ‘엔딩노트’ 작성에서부터 유언장 작성, 상속과 증여, 기부에 대한 준비, 주거와 물건 정리, 장례 절차와 방식의 결정 등 여러 활동이 망라된다. 생전에 물건을 정리하는 노인이 늘면서 한국의 당근마켓이나 중고나라와 유사한 중고거래 플랫폼 ‘메루카리’의 60대 이상 이용자도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대형 유통체인이 전국을 돌며 ‘종활 페어’를 열기도 한다. 2018년 도쿄 인근에서 열린 종활 페어를 취재했는데 입관 체험부터 장묘 시설과 장례용품 소개, 집 정리, 상속, 후견인 지정 등의 법적 문제까지 생의 마무리를 위한 모든 정보가 집결돼 있었다. 이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게 인형들의 집단장례식이다. 주최 측에 따르면 가장 반응이 뜨거운 코너라고 했다. 일본인들은 눈이 두 개 달린 것은 모두 영혼이 있다고 믿어 그냥 버리지 못하고 장례를 치러줘야 한다고 믿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장례식이 마련됐다는 것.
행사는 1000엔에 5점까지 내놓을 수 있는 유료 서비스로, 각자 내놓은 인형을 예쁘게 전시해 작별하는 시간을 갖는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스님이 독경을 해주고 주인들은 마치 장례식에 참석하듯 인형의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인형들은 다음 날 절에서 불태우는 다비식을 거쳐 한줌의 재로 돌아간다고 한다. 자녀가 태어나면 전통인형을 장만해 건강과 성장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다 보니 수십만 원을 호가(呼價)하는 값비싼 인형이 적지 않았다.
출가한 두 딸을 위해 장만했던 인형들을 내놓았다는 70대 부부는 “딸들이 갖지 않겠다고 하고 저희도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며 “이런 기회가 있어 반가웠다”고 말했다. 자신들의 삶을 조금씩 버리고 정리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한국에는 없는 감수성이지만 훗날을 생각해 인형을 자신들의 손으로 장사지내 주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유언장 썼더라면’
이 같은 웰다잉(well-dying) 운동은 아직 한국에서는 익숙지 않은 편이지만 일부 시니어들 사이에서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는 우선 자신과 가족을 위해 유언장 쓰기를 해볼 것을 권한다. “‘내 삶의 마무리는 내가 결정한다’는 마음으로 써보세요. 써보기 전과 후, 삶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그는 나아가 “상속에 대해 내가 결정해 놓지 않으면 자식 간, 형제간에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일정액을 사회에 기부하는 방안도 함께 생각해 볼 것을 당부했다.
한국에서 상속분쟁은 해마다 늘고 있다. 2020년 사법연감에 따르면 소송으로 번진 상속분쟁은 2019년 3만301건에서 2020년 4만3799건으로 늘었다. 연간 사망자가 30만 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비율이다.
유언 없이 사망한 피상속인의 유산은 본인 의도와 다르게 처리될 수 있다. 웰다잉 연구 유튜브 사이트 ‘다섯가지결정’은 최근 유언장을 쓰지 않은 어느 부녀의 안타까운 사례를 소개했다. 나이 든 딸이 병든 홀아버지를 모시며 오랫동안 간병을 했다. 수십 년 전 미국으로 이민 간 두 오빠는 이미 사망했다. 평소 아버지는 함께 사는 아파트를 딸에게 물려주겠노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유언 등 법적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딸이 아파트 명의를 받으려면 공동상속권자 전원의 동의가 필요했다. 어렵사리 미국의 조카들에게 연락을 취했는데 이들은 변호사를 통해 ‘법대로 상속하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조카들이 할아버지의 자산을 법정상속분대로 형제들이 3등분 하면 각자 아버지의 상속분을 대습(代襲·법정상속권자가 사망한 경우 직계비속이 대신 상속하는 것)으로 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결국 이 딸은 조카들과 아버지 재산을 3분의 1씩 나눠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공평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면 아버지가 사망 전에 유언을 하고 공증까지 받아뒀어야 했다는 얘기다.
노인들 사이에는 “늙어서 자식들에게 찬밥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재산을 끝까지 움켜쥐고 있으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고성춘 조세전문변호사는 이런 경우를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처럼 1000만 달러(약 120억 원)까지 상속세가 없는 나라라면 모를까, 한국의 상속공제는 5억 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배우자가 없는 노인이 10억 원을 남긴다면 상속세는 약 9000만 원, 20억을 남긴다면 4억 원 넘게 내야 한다.
○사후정리보다 생전정리, 생전정리보다 노전정리
시니어 라이프 오거나이저 국내 1호인 김민주 씨는 “시니어에게 정리란 노전(老前)정리, 생전정리, 유품정리가 있다”며 “가능하면 생전정리를 해 홀가분하게 생활할 환경을 갖추고, 더 가능하다면 조금이라도 젊을 때 물건을 줄이고 나누는 노전정리를 시작하라”고 권한다. 역할이 끝난 물건, 방치된 물건, 설레지 않는 물건은 40대부터 정리를 시작하라는 것. 이를 위해 비움-나눔-채움의 3단계 정리법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는 유품 정리를 하다 보면 인생이 뭔지 묻게 된다고 한다. “좋은 가방이나 값진 의류들은 고이 모셔 놓고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아끼다가 짐만 된 경우들이죠.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 해도 누리고 쓰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안 쓸 거라면 주변의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 주는 것도 방법이고요.”
한국은 2020년 사망자가 출생자보다 많은 시대에 돌입했다. 고령층과 1인가구가 급격히 늘면서 노인의 집 정리는 앞으로 사회적 이슈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적어도 5060세대부터 그 준비를 해야 할 듯하다. 관건은 인생에서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 다시 보는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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