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선에 출마한 주요 후보 네 명은 모두 ‘권력구조 개혁’이라는 대의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및 청와대 권력 축소, 국회 권한 강화, 책임총리제 내지 책임장관제 실시를 강조하고 있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지난 대선 때부터,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정치 입문 시기부터 이런 입장을 밝혔고, 더불어민주당(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최근 들어 이에 근접했다.
대통령에 책임 전가하는 국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도 한국 사회 중론은 “권력구조는 죄가 없다. 대통령을 잘 뽑자”였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까지 경험하고 치르는 이번 대선에서도 같은 답을 되풀이할 명분은 바닥났다. 흔히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축소해야 한다”고 하는데 더 근본적이고 구체적으로 지적해야 한다. 한국 정치는 대통령에게 주도권을 넘긴 다음, 그의 인기가 좋을 때는 그쪽을 쳐다보고 인기가 나빠지면 그에게 책임을 몰아버린다. 그동안 국회는 습관적으로 대통령을 추종하거나 반대했다. 권력과 근본적인 책임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회에 있는데도 말이다.
대안으로 나오는 제도가 책임총리제다. 청와대 권력을 내각과 국회, 정당으로 옮기는 동시에 이들이 호흡을 맞추는 것이 목적이다. 그 방법은 국무총리에게 ‘대통령과 국회 간 가교’라는 더 큰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재명, 윤석열, 심상정, 안철수 후보 모두가 말하고 있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일각에서는 안 후보 등을 선거연대 대상으로 지목하며 “차기 정부 책임총리에 앉히자”는 구상도 나온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거론하는 책임총리제가 진짜 책임총리제인지 가늠하려면 짚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책임총리는 국회 다수파가 추천해야 한다. 대통령이 결심해서 권력을 분담한다고 이뤄지지 않는다. 달리 말해 대통령이 쉽게 해임할 수 있다면 책임총리제가 아니다. 국회는 이미 총리 임명동의권을 갖고 있다. 대통령이 국회 추천 총리를 해임하거나 국회 추천 후보자를 거부한다면, 국회는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을 부결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 때문에 국회가 총리를 추천해야 책임총리제가 정착될 수 있다.
국회가 추천한 총리가 대통령과 성향이 다를수록 정국이 불안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이것은 총리 추천 과정을 따져보지 않은 단견이다. 대통령 소속 정당이 국회 과반 의석에 미달한다면 다른 당과 연합해 총리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다. 총리를 추천하는 과정에서 장관 명단도 같이 짤 수 있어 권력 배분에 용이하고, 정책 또한 조율할 것이기에 정국 불안을 야기할 소지를 줄일 수 있다.
설령 총리를 추천하는 국회 다수파에 대통령 소속 정당이 빠져 있다고 해도 대통령이 총리와 장관의 최종 임명권을 가졌다는 것을 누구도 외면할 수 없다. 이 경우 국회 다수파는 대통령에게 권력 배분과 정책 협상에서 일정 부분 양보할 수밖에 없다. 폭넓은 세력이 연합하는 ‘대연정’이 이뤄진다. 이것이 현실성이 적다고 생각한다면 국회 내 세력들은 애초부터 대통령 소속 정당을 국회 다수파 연합에 가급적 포함시키려 노력할 것이다.
둘째, 국회 추천 책임총리제를 실시하려면 새로 총선을 치러 국회를 구성하는 게 바람직하다. 현 국회는 책임총리제를 전제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국회 구성이 정부 구성을 좌우한다는 새로운 법칙을 실현하려면 그 법칙을 미리 깔아두고 선거에서 국민 의사를 물어야 한다. 따라서 민주당이나 국민의힘이 “총선 이전인 정부 출범 직후부터 책임총리제를 실시하겠다”고 하는 것은 “책임총리제를 실시하지 않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셋째, 책임총리제 등 권력구조 개혁은 선거제도 개혁 후 혹은 그와 동시에 이뤄지는 게 바람직하다.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전체 의석 300석의 60%인 180석을 얻었으나, 정당 투표 지지율은 33.5%, 지역구 투표 전국 득표율은 49.9%였다. 현행 선거제도 하에서는 절반에 미달하는 지지를 받은 세력도 과반 의석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 국회 추천 책임총리제만 도입하면 절반 미달 지지율로 과반 의석을 얻은 정당이 단독으로 책임총리까지 추천할 수 있게 된다. 지지율과 의석수 간 비례성을 높이는 선거제도 개혁이 필수다.
“이기면 여당, 져도 야권 독점”
넷째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구조개혁 전 다당제 구도가 미리 등장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권력구조나 선거제도가 개혁돼야 다당제가 등장한다는 속설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양당체제에서 거대 정당은 ‘이기면 여당, 져도 야권 독점’이므로 스스로 제도를 개혁하지 않는다. 제1야당 기득권을 누리다 때가 되면 여당이 되는 ‘정권 교대’만 주기적으로 되풀이된다.
아무리 깨려 해도 다당제가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아야 거대 정당도 현실을 인정하고 그것에 맞는 제도를 준비한다. 설령 거대 정당 중 하나의 당이 개혁을 거부해도 다당제 구도라면 거대 정당과 중소 정당의 연합으로 남은 반대 세력을 설득 또는 압박해 제도를 바꿀 수 있다. 따라서 권력구조 개혁에 진심으로 공감하면서 이를 책임지고 구현할 것인지 판명하는 명확한 잣대가 있다. 다자 구도를 지향하는가, 양자 구도를 강제하는가. 그런 점에서 지난 총선에서 위성정당을 만들어 공직선거법 개혁 효과를 반감시킨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다당제 ‘지양’ 세력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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