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든지 그 사회가 존립·발전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밝히고 정의를 세우고, 양심을 수호하려는 자들이 꼭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꼭 그러한 자가 되라는 의무는 부여받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양심이 있는 이상 우리가 바로 그러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도 그 시련이 두려워 도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같이 어울리는 가운데 묵시적으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서로 격려하면서 불모(不毛)의 열사(熱砂)를 걸어가자! 그것이 우리의 지상 명령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일절의 유혹을 뿌리치면서.”(1981년2월 10일 석열이 용락에게)
“대학생 尹, 칸트 철학에 심취”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이듬해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는 절친 신용락 변호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서울대 법대 2학년생이던 윤 후보가 5·18광주민주화운동 직전 서울대 모의재판에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해 피신한 이후. 윤 후보는 철학, 사회과학, 역사를 폭넓게 공부하고는 그해 가을부터 친구들에게 결연한 다짐을 담은 편지를 썼다.
이 편지를 공개한 신용락 변호사(62·사법시험 28회)와 이철규 변호사(61·사시 34회),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61), 이렇게 윤 후보의 절친 3인이 3·9 대선을 앞두고 ‘친구 윤석열’에 대해 직접 입을 열었다. 이들은 “윤석열에 대해 진실이 알려지지 않고 인품에 비호감 꼬리표가 붙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입을 모았다. 세 친구는 각각 초교 때부터, 고교 때부터, 그리고 대학생 시절 사시 9수를 함께했다. 그리고 윤 후보가 제1야당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을 지켜봤다. 이들이 본 윤 후보는 어떤 사람인지 소소한 이야기까지 들어봤다.
-1981년 2월 10일 윤 후보가 보낸 편지는 어떤 맥락인가.
신 변호사: “대학교 2학년 말이었다. 석열이는 모의재판 여파로 강원 강릉에 피신을 갔다 오더니 ‘법학을 공부하기에 앞서 세상을 먼저 알아야겠다’고 했다. 철학과 사회과학, 역사를 공부하고는 칸트 철학에 심취해 있었다. 석열이는 대학 2학년 무렵 삶의 철학을 굳혔던 것 같다. 지금까지 초지일관 다른 눈치안 보고 양심의 명령대로 살아왔다는 게 대단하다.”
신 변호사는 윤 후보와 서울 충암고, 서울대 법대 동기다. 판사 시절 진보 성향 법관 모임인 ‘우리법연구회’에서 활동했다. 수원지법 판사를 역임한 뒤 법무법인 원(대표 강금실·윤기원)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술을 잘 먹지 못해 윤 후보를 집에 데려다 주던 ‘뒤처리반’이었다고 한다.
-윤 후보는 어릴 적 어떤 사람이었나.
신 변호사: “석열이는 친구들에겐 ‘봉’이었다. 만나면 일단 자기 주머니부터 먼저 털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본인 돈이 모자라면 다른 친구들이 돈을 보태는 식이었다. 9수를 하는 동안 친구들, 10년 위아래 선후배들과 그렇게 지냈다. 후덕한 부모의 품성을 닮았다.”
이 교수: “석열이와 서울 대광초 1학년 1반에 같이 입학했을 때 나는 반에서 제일 작았고, 석열이는 제일 컸다. 작은 키를 걱정한 우리 어머니는 석열이에게 나를 보호해달라고 했고, 석열 어머니와도 절친이 됐다. 석열이는 리더십이 강했다. 학급신문 편집장을 했는데 보통 꼼꼼한 게 아니었다.”
범진보학자인 이 교수는 윤 후보와 서울 대광초, 서울대 법대 동기로, 우당 이회영 선생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아들이다. 윤 후보가 정치에 입문하는 과정에서 언론에 나와 윤 후보를 위한 발언을 했다. 경선과 대선 과정에서 정책본부에 참여해왔다. 친구들은 이 교수에 대해 “초등학생 때 석열이, 석열이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은 죄로 석열이를 도우며 노예생활을 하고 있다”고 농담처럼 말한다. 이 교수는 윤 후보를 ‘돌돌이’(석열의 ‘석’에서 나온 초등학생 때 별명)라고 부른다.
“덤벙덤벙 행동한 것 같은데 속은 아니더라”
-윤 후보가 성장하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이 교수: “아버님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는 존경스러운 분이다. 올곧은 원칙주의자이며 성실한 학자시다. 2013년 국정원 댓글 수사로 석열이가 법무부 징계를 받았을 때 아버님에게 ‘행정소송을 해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근데 아버님은 ‘에이, 안 되지. 그건 툭 털고 가야 한다’고 했다. 석열이도 소송하지 않았다. 2019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 때 광화문에서 ‘조국 퇴진’ 집회가 열렸다. 아버님과 식당으로 이동하려고 광화문 앞을 지나갔다. 사람들이 열렬히 윤석열을 응원했다. 그런데 아버님은 오히려 ‘나라가 분열돼 큰일이다’라고 했다. 그 정도로 치우침이 없는 분이다. 석열이도 아버님으로부터 그걸 물려받았다.”
이 변호사: “석열이 부모님에게 매년 1월 1일 세배하러 가는 85학번 후배가 있다. 지방에서 올라와 고시공부를 할 때부터 그랬다. 석열이네는 양력설을 쇘다. 후배는 홀로 서울에 있으니 석열이 어머님이 밥을 해 먹였다. 후덕하고 마음의 여유가 있는 집이다.”
부장판사 출신인 이철규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윤 후보와 같은 스터디그룹에서 공부한 ‘9수 친구’ 서울대 법대 동기다. 윤 후보가 대구지방검찰청 초임 검사이던 시절, 이 변호사는 대구지방법원 초임 판사였고 윤 후보와 같은 하숙집에서 함께 지낸 술친구다.
-사시 9수를 해서 무능한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신 변호사: 공부 방법은 비효율적이었다. 책 한 장 넘기고 째려보고, 갸웃하다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생각을 정리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기억력이 기가 막혔다. 친구들 사이에선 ‘윤석열 정답설’이 있다. 어울렸던 친구들 기억이 헷갈릴 때 석열이는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석열이가 대선 후보까지 되는 걸 보고 대기만성(大器晩成)의 의미를 깨달았다. 처음부터 큰 그릇으로 태어났고 그걸 채우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 변호사: “고시를 오래했다니까 무능, 한량처럼 보는 시각도 있는데 석열이 머리 좋다. 시험은 요령이고 집중인데, 석열이는 학문적으로 파고들었다. 시험일이 다가오고 전부 발악하듯 아등바등할 때 이 친구는 후배들이 물어보면 신나게 답을 알려주고 여유가 있었다. 춥고 배고플 때 그 사람의 진정한 성품을 알 수 있다. 석열이도 불확실한 미래를 껴안고 무척 춥고 배고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항상 주변 친구, 후배들을 챙겼다. 마음의 여유, 순수함이 참 부러웠다. 석열이가 그 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윤 후보와 술은 어떤 관계인가.
이 변호사: “술을 많이 마시긴 했다. 신림동 고시생활 때 내가 ‘안주만 다 먹고 가자’고 하면 석열이는 후딱 남은 소주를 다 마시고 소주를 한 병 더 시킨 뒤 새로운 소주병을 비우기 전 반드시 안주를 다 먹고 또 안주를 시켰다. 그렇게 안주 주문과 소주 주문을 번갈아했다. 석열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쩍벌남’ ‘열차 구둣발 논란’ 등으로 윤 후보를 권위적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신 변호사: “학창 시절 쓴 일기장엔 ‘석열이는 덤벙덤벙 무분별하게 기분대로 행동한 거 같은데 속은 그게 아니다. 역시 그 녀석은 크다. 뭐 하나 할 놈이다’라는 문구가 있다. ‘대범’과 ‘덤벙’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본다. 편견이 없고 다른 사람 눈치를 안 보는 게 본인 품성이다. 마음이 따뜻하고 인간적이며 소탈한 게 석열이다. 권위적이라는 것은 검찰총장 출신 때문에 막연히 덧씌워진 이미지다.”
-결혼은 왜 늦었을까.
신 변호사: “누구에게나 결혼은 운명이다. 석열이는 대학교 2학년 때까지 같은 동네 여학생을 짝사랑하고 괴로워하던 순정파다. 아저씨 스타일로 친구와 술을 좋아하다 보니 여자친구에게 인기가 있을 리 없었다. 9수를 하고 검사 생활하며 지방을 돌아다니다 보니 결혼 적령기를 놓쳤다. 몽달귀신 되는 줄 알았는데 뒤늦게 띠동갑과 결혼하는 행운이 있었다. 주변에선 나이 차이가 커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런데 석열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 나이에도 순정이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친구들이 보는 윤 후보의 부인 김건희 씨는 어떤 사람인가.
이 교수: “‘조국 수사’ 당시 석열이와 엄청 싸웠다. 2019년 9월 조국 후보자 국회 인사청문회 날이자 부인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를 검찰이 불구속기소한 날이었다. 이미 석열이랑은 대화가 안 되는 상황이라 ‘청문회가 열리는 상황에서 기소한 것은 부적절했다’고 건희 씨에게 폭탄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건희 씨는 답장하기 싫었을 텐데도 ‘ㅠㅠ’라고 답장을 보내며 기분을 맞추려 했다. 그 후에도 강한 의견 차이를 드러내기보다 ‘기다려보시지요’ 하는 식으로 나를 진정시켰다. 화통하면서도 침착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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