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조각의 선구자’ 탄생 100주년 회고전 ‘노실의 천사’
서울시립미술관서 내달 22일까지 ‘무료’
방탄소년단 RM 소장 ‘말’ 포함 조각 회화 등 173점 시기별 전시
‘모델의 실명’ 여인상이 최다비중… 당대 추상조각 유행 따르지않고
“작품은 자식” 자신만의 색깔 고집… 후기로 갈수록 내면세계에 천착
“인생은 공(空), 파멸.”
조각가 권진규(1922∼1973)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전 유서에 남긴 말이다. 생전 개인전을 세 번밖에 열지 못했던 그는 사후에야 ‘근대 조각의 선구자’로 불리며 재평가받았다.
그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회고전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리고 있다. 그의 회고전 중 최대 규모로, 1950∼1970년대 조각 137점과 회화, 드로잉, 아카이브 등 총 173점을 시기별로 선보인다. 유족의 기증작과 함께 이건희 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고려대박물관, 리움을 비롯한 기관과 개인 소장자에게 대여 받은 작품들로 구성됐다. 방탄소년단 멤버 RM이 소장한 조각품 ‘말’(1965년)도 포함됐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여인상이다. 전시 제목 중 ‘노실(爐室·가마가 있는 방)’은 권진규의 아틀리에를 의미한다. 그가 아틀리에를 짓고 작품 활동에 전념했던 시기에 가장 많이 만든 것도 여성 흉상이다. 여인상의 제목은 모델의 실명이다. 대개 권진규가 미술대 강사일 때 만난 제자들의 모습을 담았다.
대표작 ‘선자’(1966년), ‘지원의 얼굴’(1967년), ‘현옥’(1968년)을 보면 신체 부위가 단순화돼 있다. 머리카락이나 옷 장식이 생략돼 관람객은 여인상의 얼굴만을 똑바로 마주한다. 권진규의 작품에 기가 서려 있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옥’ 소장자 김현옥 씨(75)는 모델로 섰던 때를 떠올리며 “선생은 긴장과 안도를 동시에 느끼게 했다”고 말했다. 말이 많지 않고 담백한 사람이기도 했다. “두 달간 작업실을 드나들었는데 거리를 둬 비밀스러우셨어요. 제 얼굴 한쪽을 빚다가 ‘현옥이는 고생을 참 안 했나 보구나’ 농을 치기도 하셨죠. 집중하는 순간순간 얼굴에 분노나 격정이 보였고요.”
‘불상’(1971년), ‘흰소’(1972년)에서 볼 수 있듯 동물상, 불상, 탈 가면 등 다양한 형상을 만들었다. 그중 초기작 ‘기사’(1953년)는 그가 석조 조각의 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젊은 여인과 말의 형상을 담았다. 다섯 개의 면으로 이뤄져 각 면마다 각기 다른 형상을 띠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의 애제자였던 김정제 씨(71)는 “선생은 작품을 자식이라 불렀다”고 회고했다. “선생은 이따금씩 ‘정제야, 너는 현실과 타협하며 살거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권진규 스스로는 당대 추상 조각의 유행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 자신만의 색깔을 작품에 담았다.
권진규는 후기로 갈수록 모델의 내적 세계를 담는 데에 천착했다. 자신을 승려로 형상화한 ‘가사를 걸친 자소상’(1969∼1970년), 예수의 번뇌를 담아낸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1970년)가 대표적이다. 한희진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권진규는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영혼, 사라지지 않는 영원성을 추구했다”고 말했다.
전시 공간은 권진규의 정체성을 곳곳에 반영했다. 전시장에는 우물과 가마를 떠올리게 하는 모양의 좌대가 삼공블록과 벽돌로 만들어져 있다. 1965년 신문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권진규가 삼공블록과 벽돌을 이용해 자기 작업실을 형상화한 데서 착안했다. 5월 22일까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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