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가 하늘을 난다. 그물을 잡아당길 때마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봄 하늘로 높이 솟구친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멸치는 항구로 쏟아진다. 선원의 얼굴에도, 옷에도, 모자에도 온통 멸치다. 지나가는 구경꾼들은 멸치를 줍느라 바쁘고, 항구의 갈매기는 호시탐탐 멸치를 노리며 쉼 없이 울어댄다.
4∼6월 부산 기장군 대변항에 가면 볼 수 있는 ‘멸치그물 털기’ 현장이다. 겨우내 먼바다에서 통통하게 살이 오른 뒤 부산 앞바다를 찾아오는 생멸치 회는 봄에 대변항에서 맛볼 수 있는 미식이다. 멸치가 튀어 오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약동하는 봄의 힘찬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올해는 기장 멸치축제도 3년 만에 다시 열린다.
● 기장 미역에 싸 먹는 생멸치 회
멸치회로 유명한 부산 기장군 대변항(大邊港)은 독특한 이름 때문에 더욱 유명한 포구다. 개교 이래 55년간 ‘똥학교’로 놀림받던 대변초등학교는 2017년 용암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꿨다는 소식이 뉴스에 전해지기도 했다. 부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 5학년 학생의 공약이 실현된 덕분이었다. 그러나 대변항은 조선시대 이곳에 있던 대동고(大同庫)라는 창고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대동고 주변의 포구’라는 뜻으로 ‘대동고변포(大同庫邊浦)’라는 이름이 붙었고, 줄임말로 ‘대변포’ ‘대변마을’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실제로 가 본 대변항은 깊숙이 들어간 만이 아늑하고 예쁜 미항이다. 혹자는 둥그렇게 생긴 항구가 펑퍼짐한 엉덩이를 닮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대변항에서는 전국 멸치 60%가 공급된다. 포구의 가건물에는 “멸치젓 사이소” 하는 외침이 들리고, 항구 주변 가게들에서는 석쇠에 멸치를 통째로 굽는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대변항에서 볼 수 있는 멸치는 몸길이 10∼15cm의 크고 굵은 ‘대멸’이다. 어른 손가락만 한 크기의 기장 멸치는 고깃배가 멸치 떼를 따라가며 잡는 ‘유자망(流刺網)’ 어업 방식으로 잡는다. 유자망은 배와 함께 떠다니는 그물로, 떼를 이뤄 이동하는 멸치가 그물코에 그대로 꽂히게 된다. 남해, 사천에서는 대나무 말뚝을 촘촘히 박아서 만든 죽방렴으로 멸치를 잡고, 제주도에서는 바닷가에 돌담을 쌓고 멜(멸치의 제주 방언)을 잡기도 한다. 몇 해 전 제주도에서 다이빙을 하던 중 멜 떼를 만났는데, 수백 마리의 멸치가 바닷속에서 투명한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거리는 모습은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대변항에서 새벽에 출항한 유자망 어선은 오후 3시부터 해 질 녘까지 항구로 돌아온다. 길이가 2km나 되는 유자망 어선에는 은빛 멸치가 가득 꽂혀 있다. 10여 명의 선원들이 박자를 맞추어 손목 힘으로 그물을 당기고 내려치기를 반복한다. ‘어야라 차이야∼ 어야라 차이야∼.’ 어부들은 ‘멸치 후리소리’의 구성진 가락에 맞춰 그물에 걸린 멸치를 털어낸다. 한 사람이라도 엇박자를 낸다면 멸치를 그물코에서 떼어낼 수 없다. 멸치는 하늘로 치솟았다가 떨어지면서 머리가 떼어지고, 내장이 터지기도 한다. 서너 시간이 지나면 선원들의 얼굴은 땀과 비늘로 범벅이 된다. 신성한 노동,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멸치는 급한 성질 때문에 그물에 잡아 올리면 바로 죽어 버린다. 그래서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멸어(蔑魚)’라고 했다. 생멸치 회는 부산 대변항과 남해안 거제, 제주 등의 일부 포구에서만 맛볼 수 있다. 멸치회는 미나리와 양파, 상추 등 각종 채소를 넣고 새콤달콤하게 무쳐내는데, 기장 미역에 싸서 먹어야 제맛이다. 멸치구이는 석쇠에 올려 머리부터 꼬리까지 통째로 구워 먹는다. 큰 멸치인데도 뼈가 부드러워 발라낼 필요가 없다. 된장 베이스의 자작한 국물에 배추 우거지와 무를 넣고 끓여낸 멸치조림, 멸치찌개도 있다. 조림과 찌개 속 통멸치를 밥과 함께 상추와 깻잎, 다시마에 싸서 먹는 ‘멸치쌈밥’은 고소한 멸치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별미다. 대변항에서 잡힌 멸치는 횟감이 아니면 말려서 국물용으로 쓰거나, 멸치젓을 담가서 판다. 국물을 낼 때는 멸치 똥까지 통째로 삶아야 한다. 내장과 뼈까지 포함한 멸치 똥까지 들어가야 깊은 맛이 나기 때문이다. 멸치는 바다 생태계의 최하위에 속하기 때문에 플랑크톤밖에 먹지 않아 내장도 깨끗한 편이다. 멸치는 갈치, 농어, 다랑어, 고래류, 바닷새들에게 소중한 먹이다. 멸치가 풍부할수록 어업생산량이 늘어난다. 이 때문에 멸치는 우리 바다를 풍요롭게 만들고, 한국인의 밥상을 책임지는 어엿한 생선이다.
“똥이라 부르지 말자/(중략)/바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 잡아먹은 적 없이 잡아먹혀서/어느 목숨에 빚진 적도 없으니 똥이라 해서 구리겠느냐/(중략)/밸도 없이 배알도 없이 속도 창시도 없이/똥만 그득한 세상을 향하여/그래도 멸치는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등뼈 곧추세우며/누누천년 지켜온 배알이다”(복효근의 시 ‘멸치똥’)
대변항 일대에서는 20일부터 3일간 기장멸치축제가 열린다. 코로나19로 3년 만에 다시 열리는 행사다. 육지에서는 멸치잡이를 기원하는 풍물패 퍼레이드가 열리고, 대변항 일대 바다에서는 어선들이 줄지어 행진을 벌인다. 인근 해운대 해수욕장에서는 20일부터 나흘간 ‘해운대 모래축제’도 열린다. ‘모래로 만나는 세계여행’을 주제로 에펠탑, 피라미드 등 세계 각국의 랜드마크를 모래 작품으로 선보인다. 축제 첫날인 20일 오후 8시 반에는 해상 불꽃쇼도 펼쳐진다.
● 아홉산 숲과 죽성드림세트장
대변항을 구경한 뒤에 인근 기장군 철마면의 온통 초록세상인 ‘아홉산 숲’을 구경하는 것도 좋다. ‘휴대폰을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는 광고가 떠오를 정도로 사계절 청정한 대숲의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홉산(해발 361m)은 9개의 골짜기를 품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임진왜란 직후 이곳에 정착한 남평 문씨 가문이 9대에 걸쳐 금강송과 대나무, 편백, 삼나무 등 수백 종의 나무를 심고 가꿔온 숲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숲을 따라 난 탐방로는 총 3.2km. 천천히 산책하며 둘러보는 데에는 1시간 반가량 걸린다. 입구에 들어서 금강송 군락지를 지나면 아홉산 숲을 상징하는 빽빽한 맹종죽 대나무 숲이 펼쳐진다. 영화 ‘군도’에서 하정우가 무공을 익히던 장면, 영화 ‘대호’에서 최민식이 호랑이를 추격하던 장면도 모두 이곳에서 찍었다. 대숲 가운데에 있는 굿터에는 두 개의 돌기둥이 서 있는데 가족들과 연인들이 사진을 찍는 포토존이다. 매표소 입구에는 문중의 종택인 관미헌이 있다.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구갑죽(龜甲竹)’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신기한 모양이 눈길을 끈다. 대나무 마디가 일(一)자가 아니라 거북 등 껍데기처럼 다이아몬드 형태로 울퉁불퉁하게 생겼다. 1950년대 중국에서 일본을 거쳐 들여온 뿌리를 이식한 것으로,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아홉산 숲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대나무였다고 한다.
대변항에서 해안도로를 달려 기장읍 죽성리 두호마을에 다다르면 푸른 바다 갯바위에 붉은색 첨탑과 지붕이 아름다운 건물이 눈길을 끈다. 성당처럼 생긴 이 건물은 2009년 방영된 SBS 드라마 ‘드림’을 촬영했던 세트장이다. 이곳은 분홍빛 노을로 물드는 해 질 녘에 찾아가면 더 아름답다. 성당 외벽 곳곳에 켜진 조명이 바닷물에 비치는 모습이 낭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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