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광주 백운초등학교 4학년 4반 교실. 담임교사 대신 교단에 오른 안전환경보건단체 ‘일과건강’의 박수미 대외사업팀장이 전동드릴처럼 생긴 휴대용 X선 형광분석기를 꺼내 들었다. 중금속 등 유해화학물질 함유량을 측정하는 기기다.
“이걸로 여러분 책상과 의자에 유해물질이 얼마나 많은지 검사해 볼게요.”
학생들 얼굴에 긴장감이 스쳤다. 약 30초 뒤 나온 결과는 ‘기준 이하’. 박 팀장이 “책상 위와 의자 다리의 플라스틱은 안전하다”고 말하자 그제야 아이들은 안도했다. 박 팀장은 칠판 옆 초록색 게시판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안전한 제품도 오래 쓰다 보면 유해물질이 나올 수 있어요. 게시판에 압정을 꽂고 뺄 때, 납이나 프탈레이트라는 성분이 작은 가루 형태로 묻어나와 우리 몸속으로 들어올 수 있어요.”
프탈레이트는 폴리염화비닐(PVC) 등 플라스틱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사용되는 첨가제다. 내분비계 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환경호르몬의 일종이다. 발달 및 생식 기능 저하를 일으킬 수 있어 13세 이하 어린이 대상 제품에는 총함량이 0.1% 이하로 엄격히 제한된다.
○ “유자학교 만난 뒤 환경에 관심”
정규 교과에 없는 이 수업의 이름은 ‘유자(유해물질로부터 자유로운 건강한)학교’다. 아름다운재단과 일과건강이 2020년부터 교실 환경을 개선하고 유해물질에 대한 아이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운영 중인 프로젝트다. 올해는 전국 29개 학교, 1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하고 있다.
학생들은 한 달 동안 수업을 듣고 직접 유해물질 노출을 줄이는 환경 개선 아이디어도 낼 예정이다. 박 팀장은 “가죽 대신 천, 플라스틱 대신 나무, 같은 플라스틱이더라도 PVC 대신 폴리프로필렌(PP)나 폴리에틸렌(PE) 성분을 쓰는 것이 안전하다”고 설명했다.
유자학교가 학생들에게 화학물질의 유해성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수업은 화학물질을 안전하게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박 팀장은 상어가 나타난 바다 그림 두 장을 모니터에 띄웠다. 왼쪽은 사람이 상어 옆에서 헤엄치는 그림, 오른쪽은 사람이 모래사장에 서 있는 그림이었다.
“바다에 상어가 있어도 내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위험하지 않아요. 왼쪽 상어처럼 화학물질도 적정한 사용법을 지키지 않거나 사용 기준량 이상으로 인체에 노출됐을 때 위험한 거예요.”
한 달째 수업을 들으면서 아이들의 환경과 안전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물건을 살 땐 국가통합인증마크(KC)나 친환경 표시를 확인하는 학생들도 있다. 이 학급 담임인 김제강 교사는 “학생들이 쓰레기 재활용 문제,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 등 다양한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 어린이 시설 15%가 환경 기준 위반
중금속 범벅인 우레탄 트랙 등 학교 시설의 유해물질 검출 논란은 10여 년 전부터 지속돼 왔다. 하지만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제주도에서는 조사 대상 85개 학교 중 60곳의 운동장에서 기준치를 초과한 프탈레이트 등 유해물질이 검출됐다. 2017년부터 우레탄 트랙에 프탈레이트 사용이 제한됐지만 이미 설치한 학교 중에는 기존 시설을 그대로 쓰는 곳이 적지 않다.
유해물질에 더 취약하고 사용법을 지키기 어려운 유아들도 유해물질에 노출돼 있다. 2019년 환경부의 어린이 활동 공간 점검 결과를 보면 8457곳의 보육 및 교육시설 중 1315곳(15.5%)에서 환경 안전 기준을 위반했다. 도료나 마감재에서 기준치 이상의 납·수은·카드뮴이 검출된 곳이 1270곳으로 가장 많았다.
2015년 만 13세 이하 어린이 제품의 안전 기준을 정한 ‘어린이제품안전특별법’에 제정됐지만 여전히 사각지대가 적지 않다. 박 팀장은 “13세 이하 어린이가 사용할 목적으로 만든 제품만 이 법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성인들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칠판과 게시판 등 학습도구는 안전 기준이 허술한 편”이라고 지적했다.
○ 뒷북 단속보다 선제 관리 필요
학습도구나 장난감 속 유해물질은 아이들의 건강에 치명적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에 따르면 환경성 질환인 성조숙증을 겪는 9세 미만 어린이는 2016년 6만2283명에서 2019년 7만8199명으로 약 26% 늘어났다.
해외 직구나 수입 등 유통구조가 다양해지면서 아이들이 유해물질에 노출될 위험도 커졌다. 지난달 고영림 을지대 보건환경안전학과 교수가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중국산 점토 65개 중 14개에서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 성분이 검출됐다. 이는 사망자 1700여 명이 발생한 가습기 살균제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성분으로 국내에선 사용이 금지돼 있다.
전문가들은 기업의 도덕적 해이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특정 물질의 사용을 규제하면 유해성이 비슷한 다른 물질로 대체하는 식이다. 고 교수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 후 CMIT 성분을 금지하니 화학구조가 유사한 옥틸이소티아졸론(OIT)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며 “정부의 선제적인 관리감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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