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배터리 관련 장비를 생산하는 A업체는 2006년 중국 현지 기업을 인수한 뒤 줄곧 중국에서 사업을 이어 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미국에 공장을 증설하는 방향으로 경영 방침을 바꾸기로 했다.
표면적으로는 삼성SDI 등 굵직한 국내 거래처들이 잇달아 미국 진출을 선언하며 협력업체인 A사도 미국행을 택하는 모습이지만 속사정은 따로 있다. 중국 투자에 따르는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서다. A사 관계자는 “미중 관계가 악화하고 있고 중국 내 지역 리스크가 점점 커져 중국 내 추가 투자는 어렵겠다는 내부 논의가 있었다”며 “미국의 경우 투자 금액이 훨씬 커 부담이 되겠지만 사업 확장성을 고려해 투자 방향을 바꿨다”고 말했다.
○ “비용보다 정치·안보 리스크 고려해 투자 전환”
미중 패권 경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감염병 사태 등의 영향으로 기업들의 투자 방향이 변화하고 있다. 과거엔 비용 절감을 고려해 중국, 베트남 등에 투자를 늘려 왔지만 정치·안보를 중심으로 경제 구조가 재편되며 동맹국과 공급망을 구축하는 프렌드쇼어링, 자국 내 투자를 늘리는 리쇼어링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8일 한국수출입은행 해외직접투자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대미 투자액은 2012년 58억9900만 달러에서 지난해 275억9000만 달러로 약 368% 증가했다. 대중 투자액은 같은 기간 42억6300만 달러에서 66억6800만 달러로 56% 느는 데 그쳤다. 한국이 투자해 설립한 신규 법인 수도 지난해 미국은 617개, 중국은 261개로 집계됐다. 중국 내 한국 신설법인은 2006년 2392개까지 늘었지만 꾸준히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둘러싼 한중 갈등과 미국과 중국의 갈등, 우방국을 향한 미국의 경제동맹 요구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들어 국내 대기업들의 핵심 사업으로 떠오른 반도체와 배터리 등과 관련해 미국이 자국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하는 것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대기업 투자도 국내+미국 중심으로
대기업들의 투자도 국내 투자나 미국 투자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지난달 자산 기준 10대 그룹이 발표한 투자 금액은 총 1055조6000억 원으로 이 중 국내 투자는 860조 원에 이른다. 삼성과 SK, 현대자동차 등은 국내 투자와 함께 해외 투자액의 상당 부분을 미국 내 투자를 중심으로 구상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는 2012년과 2018년 중국에 메모리 낸드 생산공장을 착공한 뒤 중국 관련 대규모 투자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SK그룹 역시 2019년 이후 중국 공장 추가 계획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BBC(배터리 바이오 반도체) 사업을 중심으로 미국 현지 기업 투자와 생산설비 진출을 확대하고 있다.
이처럼 동맹국과 자국을 중심으로 하는 투자는 앞으로도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핵심 산업 분야의 기술동맹을 강조하고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를 발족하는 등 경제 동맹국을 확보하려는 패권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다만 생산성이나 비용보다 정치·안보가 경제를 잠식하며 공급망 재편이 오히려 국제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인건비와 원자재 가격 절감을 위해 사용해 온 오프쇼어링 전략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면 원가가 오르고 물가와 소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 핵심 수출시장인 중국과의 관계가 틀어질 경우 기업 실적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국내 기업들이 프렌드쇼어링 흐름 속에서도 중국에 파트너십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시그널을 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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