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빌딩 방화 7명 사망]
대구서 변호사 사무실에 방화, 50대 용의자도 숨져… 7명 사망
해당 변호사 출장중이라 화 면해 같은 사무실 변호사-직원들 참변
희생자 2명에 자상… 부검하기로
변호사 사무실이 모여 있는 대구시내 빌딩에서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해 7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다치는 참사가 발생했다. 경찰은 부동산 투자금 반환 소송에서 패소해 앙심을 품은 50대 남성이 상대 측 변호사 사무실에 불을 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9일 대구소방안전본부와 대구경찰청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 55분경 수성구 범어동 우정법원빌딩 2층 사무실(203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신고가 119에 접수됐다. 곧바로 출동한 소방대가 22분 만에 진화했지만 김모 변호사(57) 등 이 사무실에서 일하던 6명과 방화 용의자 천모 씨(53)가 현장에서 숨졌다. 부상자 50명은 모두 경상으로 그중 31명이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경찰 조사 결과 203호 사무실은 계단과 거리가 먼 데다 불길이 순식간에 확산돼 근무자들이 미처 피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1995년 12월 사용 승인을 받은 이 건물은 스프링클러가 지하에만 설치됐을 뿐 지상 층에는 없었다. 경찰은 “지상 스프링클러 의무 설치 대상이 아니다”라고 했다.
203호는 김 변호사와 배모 변호사(72)가 함께 쓰는 사무실이다. 경찰은 천 씨가 배 변호사에게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법조계에 따르면 천 씨는 2013년 대구 수성구 주상복합아파트를 지으려는 시행사에 6억8000만 원을 투자했다. 사업이 진척되지 않자 지난해 4월 시행사 대표를 상대로 약정금 반환 소송을 냈는데 1심에서 패소했다. 이때 시행사 대표 측 법률대리인이 배 변호사였다. 배 변호사는 이날 출장으로 사무실을 비워 화를 면했는데, 함께 사무실을 쓰는 김 변호사와 직원들이 화를 당했다. 경찰은 희생자 2명의 몸에서 날카로운 물체에 찔린 자상을 발견하고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망 원인을 밝힐 예정이다.
경찰은 화재 발생 빌딩 폐쇄회로(CC)TV 영상을 확보해 천 씨가 인화성 물질이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상자를 집에서 들고 나온 뒤 흰 천으로 감싸 안고 화재 빌딩 2층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확인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이날 성명서를 내고 “변호사 개인을 향한 범죄를 넘어 사법 체계와 법치주의를 위협하는 중대한 도전이자 야만 행위”라며 범행을 규탄했다.
출입문 막고 선 범인 “같이 죽자”… 인화물질 뿌린뒤 불질러
‘사무실 유일 생존’ 사무장 증언
“죽겠구나 싶어, 불길 뚫고 탈출 나머지 직원들은 미처 못피해” CCTV속 용의자 인화물질 가져와 2층 사무실 올라간 후 25초뒤 연기 옆 사무실 직원 “문고리 너무 뜨거워 어깨로 문 밀쳐내고 겨우 빠져나와” 밀폐된 사무실 신속 대피 어렵고 스프링클러도 설치 안돼 피해 키워
“(범인이) ‘같이 죽자’고 외치더니 갑자기 인화물질에 불을 붙였다.”
9일 대구 수성구 범어동 우정법원빌딩 화재로 방화 용의자를 포함해 변호사 사무실에 있던 8명 가운데 7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김모 씨는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이같이 증언했다.
이석화 대구지방변호사회장이 전한 김 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 화재는 방화 용의자가 건물 2층에 있는 203호 사무실에 가져간 인화물질을 뿌린 뒤 불을 붙이면서 시작돼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범인이 출입문 바로 앞에 불을 지른 탓에 사무실 직원 대부분은 미처 피할 겨를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생존한 김 씨는 출장으로 화를 면한 배모 변호사(72)의 사무장이다.
○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다”
김 씨는 사건 당시 203호 안에 있는 별도 방에 있다가 밖이 소란스러워 나왔을 때 범인이 불을 붙였다고 전했다. 이 회장은 “김 씨가 이러다 죽겠다 싶어 연기와 불길을 뚫고 간신히 탈출했는데, 나머지 직원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연기에 질식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이 회장 역시 건물 4층 사무실에 있다가 소방에 구조됐다.
건물 내 폐쇄회로(CC)TV 화면을 보면 이날 오전 10시 52분경 청바지와 청록색 점퍼 차림의 남성이 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방화 용의자 천모 씨(53)였다.
그는 빨간색 가방을 메고 작은 상자로 보이는 물건을 흰 천으로 감싼 채 들고 있었다. 경찰은 이 물체에 시너 같은 인화물질이 담겨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온 천 씨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낸 뒤 곧바로 203호실로 향했다. 약 25초 뒤 주변 사무실 등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오고 짙은 연기가 2층을 뒤덮었다.
경찰에 따르면 화재 현장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의 범어동 한 아파트에 사는 천 씨는 이날 집에서 인화성 물질을 챙겨 나온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그의 집에서 인화물질이 담긴 통을 발견하고 감식을 의뢰했다.
불이 난 사무실 바로 옆인 202호에서 근무하는 한 남성은 “방화범의 목소리로 추정되는 격앙된 고함이 들리더니 폭발음과 함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건물이 흔들렸다. 끔찍한 비명도 들렸다”며 “문고리를 잡았는데 너무 뜨거워 어깨로 문을 부딪쳐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했다.
○ 스프링클러 없어 피해 커져
소방당국이 화재 신고로부터 22분 만인 오전 11시 17분경 불을 모두 껐음에도 사망자가 다수 발생한 건 건물 자체가 화재에 취약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화재가 발생한 건물은 대구지방법원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며 지하 2층∼지상 5층 규모다. 다수의 변호사 사무실이 밀폐된 형태로 모여 있는 데다 사무실 창문이 작아 연기가 원활하게 배출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건이 일어난 층에는 스프링클러도 설치돼 있지 않았다. 수성구에 따르면 1995년 12월 사용 승인이 난 이 건물은 당시 규정에 따라 지하층에만 스프링클러가 설치됐다. 현행법상 6층 이상 건물의 경우 의무적으로 스프링클러를 설치해야 하지만 이 건물은 5층이어서 현행 규정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대피한 이들에 따르면 당시 순식간에 검은 연기가 건물 복도를 꽉 채우면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2층의 변호사 사무실 직원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한 손으로는 입과 코를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 바닥과 벽을 짚으며 겨우 빠져나왔다”고 했다.
각 층 사이 통로는 좁은 계단과 엘리베이터 한 개뿐이어서 2층부터 차오른 연기가 순식간에 위층으로 올라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연기 흡입으로 인한 부상자가 47명이나 나왔다. 일부는 건물 외벽 쪽에 설치된 비상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긴급 대피해 고립돼 있다가 나중에 구조됐다.
이 건물은 매년 한 차례 민간 업체로부터 점검을 받은 뒤 결과를 소방서로 통보하는 ‘자체 점검 대상’이며 최근 2년 동안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대구소방안전본부 관계자는 “건물 내 비상 통로가 제대로 확보돼 있었는지 등을 조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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